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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4. 2021

2권 아가멤논의 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2권

책을 읽다가 포기하는 지점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가 열거되는 레위기와 신약성경에서 족보가 나오는 복음서의 대목이고, 《일리아스》에서는 그리스군(아카이오이족 Achaeans)의 장군과 함선, 트로이 군의 장군과 함선 목록이 열거된 2권이 그 지점이다. 그런데 문제없다. 영화를 시작할 때 등장인물의 이름이 등장하고, 마칠 때 수많은 이름들을 열거하는 장면이 나오듯이, 《일리아스》의 24권 중 2권과 23권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영화의 구조와 같다. 전문가에게는 의미있는 내용이지만 초보자라면 그냥 훑어보고 지나가도 좋겠다.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리 많은 이름이 나열되어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영화관계자들에게는 그 이름이 중요하듯이, 《일리아스》 전문가들에게는 2장의 목록이 보물처럼 소중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일리아스》의 2권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알고 싶지도 않다. 시간이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이렇게 유명한 고전에게 한 방 먹이고 《일리아스》 2권을 읽었다. 늘 고전의 무게 앞에서 주눅만 들다가, 엄청난 고전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주눅이 들지 않으니 기세가 오른다. 《일리아스》 2권에 제목을 붙인다면 <아가멤논의 꿈과 함선목록>이라고 붙이겠다. 1권에서 아칼레우스가 분노하여 바다의 신 어머니 테티스에게 하소연했는데, 테티스는 올림푸스 산에 있는 제우스 신에게 가서 아들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회복하게 해 달라고 탄원한 바 있다.



아가멤논 꿈에 나타난 네스토르(Nestor)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회복할 방안을 밤새 고민한다. 자칫하면 그리스 군대를 편들고 있는 여신들인 헤라(주노)와 아테나(미네르바)의 언성을 살 수 있어서 보통 고민이 아니다. 제우스(주피터, Jove)는 아가멤논이 가장 신뢰하는 현명한 노인 넬레우스의 아들 네스토르로 변신해서 아가멤논의 꿈에 나타난다. '지금은 잠잘 때가 깨어서 트로이를 함락할 때'라고 말해준다. '제우스가 트로이에게 재앙을 내려서 우리가 이기게 될 것'이라고 조언하는 꿈이다. 변신의 귀재 제우스 다운 발상이다. 뱀의 모습으로 다가와 하와를 유혹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금단의 선악과를 먹게 했듯이, 제우스도 아가멤논이 가장 신뢰하는 늙은 현인 네스토르로 다가와서 아가멤논이 전쟁을 벌이도록 유혹하고 있다. 이처럼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다. 네스토르는 필로스의 왕으로 90척의 배를 가지고 아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네스토르는 비록 실패했지만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원로이다.



아가멤논의 반전


10년째 끌고 있는 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좋은 꿈을 꾸고 아가멤논은 전군의 지휘관들을 모아서 이 꿈이 어떤 꿈인지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고 드디어 트로이를 멸망시킬 때가 왔다는 좋은 신호라고 의견을 모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아가멤논이 모든 장병들을 소집해서 자신의 꿈과는 반대로 이야기를 한다. '10년 동안 트로이를 멸하지 못한 것은 신들이 돕지 않는 것이니, 이제라도 트로이와 전쟁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자'라고 말한다. 


장병들은 가뜩이나 가족이 그립고 9년 동안 버티느라고 지쳤는데 대부분이 닻을 올리고 배를 타고 고향 쪽으로 출발한다. 이때 아테나(미네르바) 여신이 오디세우스(율리시스)에게 접근해서 장병들을 돌이키도록 조언한다. 오디세우스는 칼카스의 예언을 상기시키면서 원정 10년이 된 자신들이 이제는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장병들을 격려한다. 네스토르 역시 병사들을 격려한다. 오디세우스와 네스토르의 격려 덕분에, 장병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가자고 마음을 바꾼다.



아가멤논의 지도력 & 제우스의 계획


아가멤논은 총사령관답다. 꿈을 통하여 전쟁에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차서 기뻐했지만, 장병들에게 '전쟁에 승리할 것이니 싸움을 준비하라'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에게 안기라'라고 했다. 사실 그게 장병들의 속마음이었다. 저들은 배를 타고 돌아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아가멤논은 그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아테나 여신도 가세하고, 오디세우스와 늙은 현자 네스토로도 가세를 해서 장병들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공동체가 자발적인 참여를 하도록 그 과정을 거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가 있다. 아가멤논과 그리스 군대, 아테나 여신까지 도와서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전쟁을 준비했으나, 제우스의 뜻은 그리스가 이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하여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높이려는 것이었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계획은 신에게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3권부터 7권은 트로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아가멤논의 꿈, 현명한 네스토르 옆에 독수리가 보인다. 제우스가 변장한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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