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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프롤로그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2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다! 어느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으랴!


키르케고르는 가명의 저자 '요하네스 데 실란티오(침묵의 요하네스)'을 내세워 《공포와 전율》에서 창세기 22:1-18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기꺼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당연히 믿음의 아버지로 인정한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일평생에 거친 과제이며 치열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 믿음을 위한 치열한 과정은 생략한 채, 그 믿음을 전제로 앞으로 나가려고만 한다. 그러나 실상, 믿음의 기반이 없다!!그러나 이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게 문제다.


<도입부(Exordium)>와 <아브라함 찬사>에서, 가명저자 요하네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하지도 않았고, 불평하거나 울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처지를 그 누구에게도 나누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도입부>는 아브라함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을 4가지로 제시하는데, 이 4가지 대안은 모두 아브라함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시나리오이다. <아브라함 찬사>의 내용은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거나, 아브라함이 한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비극적 영웅과 믿음의 기사의 차이


가명저자 요하네스는 윤리적 단계를 보여주며 사람들로부터 보편성을 획득하는 비극의 영웅(the tragic hero)과 종교적 단계를 보여주는 믿음의 기사(the knight of faith)의 차이를 말한다. 비극의 영웅은 무한한 체념 운동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편성을 표현한다. 반면 믿음의 기사는 무한한 체념 운동과 동시에 신앙의 도약이라는 이중 운동을 한다. 믿음의 도약(the leap of fatih)에서는, 불합리(the absurd)를 통하여 모든 것을 되돌려받는다비극적 영웅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그를 칭송하고 그를 위해서 눈물 흘리지만, 신앙을 위해서는 아무도 칭찬하거나 눈물흘리지 않고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공포와 전율>에서 3가지 문제를 던진다. 


1.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2.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3. 아브라함이 자신의 기도를 사라와 엘리에실과 이삭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일이었던가?


첫째 문제는 헤겔의 주장을 반박한다. 헤겔은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이며, 모든 것은 목표(telos)는 자기 바깥에 있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시도한 것은 살인이다.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은 보편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가 있어야만 한다. 아브라함은 보다 높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것에 복종하기를 중지했다.


둘째 문제는 칸트의 윤리학을 반박한다. 칸트의 윤리학과는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요구한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윤리적 의무를 묵과했다. 그 결과 그는 윤리적인 것에 유혹되지만 그러나 고수한다. 


셋째 문제는 아브라함이 왜 자신의 과업을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누설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숨기는 것은 단독자와 연결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단독자로 행동했고,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어서, 그의 그런 행동을 설명하거나 누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하네스는 믿음은 정열을 필요로 하며, 정열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믿음의 정열은 우리 스스로 체험해야만 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의 정열을 이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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