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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믿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것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7

일하는 자만이 빵을 얻는다.

서론적 구상에서 저자는 '일하는 자만이 빵을 얻는다'는 속담을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에서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정신의 세계에서 이 말이 적용된다. 정신세계에서는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비가 내리지 않고, 여기서는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똑같이 햇빛이 비치지 않는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일하는 자만이 빵을 얻고, 불안 속에 있었던 자만이 안식을 찾고, 지옥으로 내려가는 자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제하고, 칼을 뽑는 자만이 이삭을 얻는다. 이것이 그곳의 법칙이다. 일하기를 원치 않는 자는 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신들이 애인 대신에 공기의 형상으로 오르페우스를 속였듯이 속임을 당한다. 왜 그를 속였을까? 오르페우스는 용기가 없고 나약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는 칠현금 연주자일 뿐이지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와 전율》 40-41쪽


어떤 사람이 설교자로부터 아브라함이 희생제물을 드린 이 이야기를 듣고서 집으로 그의 아들을 죽이러 집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하자. 그 설교자는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만든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바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모순 속에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불안이 없으면 아브라함은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중략)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같아질 수 있을 뿐이지 살인을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공포와 전율》 45쪽.


저자 요하네스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다면 다음의 4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음을 제시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한 것이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를 시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묘사할 것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사랑은 보통 아버지의 아들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이다. 


셋째,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매 순간 언제든지 아브라함이 마음을 바꾸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넷째, 저자는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아브라함을 언급할 수는 있지만 그를 필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나는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예민한 두뇌를 타고났습니다. 예민한 두뇌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항상 믿음의 운동을 하기에는 무척 어렵습니다."(《공포와 전율》 50쪽)



 '헤겔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도 믿음을 칭찬하지 않는다'라고 요하네스 데 실란티오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기가 철학하기보다 더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헤겔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철학은 믿음이 아니며, 철학은 믿음을 가지게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철학이 '우리의 믿음이 무가치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다. 요하네스는 자신이 믿음의 사람은 못된다고 말한 후, 그가 만일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에 놓였더라면, 그는 아브라함처럼 행동할 수 없었으리라고 말한다. 


(1) 물론 아브라함처럼 행동을 따라서 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라고 생각하고 슬퍼했을 것이다. 자신은 운명에 체념했을 것이며, 그 체념은 믿음을 대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2)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자기 자식을 사랑했더라면, 애초에 모리아산으로 출발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3) 마지막으로,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여 이삭을 바쳤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삭을 돌려받았더라도, 그 모든 경험 때문에 생겨난 고통을 결코 극복하지 못하고, 이삭이 살아 돌아왔더라도 이삭과 함께 기뻐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저자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브라함이 한 모든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다 해도 기쁨이 없을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사라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신뢰도 사라졌을 것이란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요하네스는 "불합리(the absurd) 덕택에"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불합리하기 때문에'(by virtue of the absurd)라는 말은 터툴리안의 말(불합리한 고로 믿는다)을 떠올리게 한다아브라함의 믿음 또는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인간적인 계산이나 논리적인 어떤 것도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삭을 포기하는데 필요한 무한한 체념을 넘어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신앙이다. 신앙의 유한한 이중 운동(the finite double movement of faith) 덕분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전적으로 포기하고도 그를 다시 한번 더 도로 받았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해했으며, 자기들도 그 이야기처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오해했으며, 믿음의 이중 운동은 고사하고, 첫 번째 단계인 체념(regisignation)의 단계에서도 실패했으리라. 아브라함은 하나의 역설이다. 아브라함의 역설에서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도출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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