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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차이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8

문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윤리적인 것이란 보편적인 것을 뜻한다. 보편적이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인 것은 '텔로스(telos, 최종 목적)를 가졌다. 단독자의 텔로스(최종목적)는 개인의 독특성이 소멸된 보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요하네스는 말하기를, 만일 윤리적인 것이 우리가 추구할 최상의 것이라면, 개별 인간을 "악의 도덕적 형태"라고 부른 헤겔이 옳았겠지만, 그렇다면 헤겔이 아브라함을 살인자라고 비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적인 것 너머로 솟아오르는 역설이다(Faith is the paradox that the single individual can rise above the universal).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은 사라질 것이고 - 만일 개인이 보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면 아브라함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뜻 - 신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왜냐하면 신앙은 항상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앙은 사고가 침투할 수 없는 범주이다(Faith is a catagory that is impervious to thought). 왜냐하면 신앙은 매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매개란 보편적인 것 덕택에 발생하는데, 신앙은 보편적인 것을 넘어선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윤리적 관계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되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윤리적 원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비극의 영웅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살인자이든지(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니면 신앙의 기사이다(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극적 영웅(Tragic Heros): 윤리적 실존


요하네스는 윤리적인 것을 넘어서지 않고서 -그러니까 윤리적인 차원의 - 아버지가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첫째는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Iphigenia)를, 둘째는 입다가 딸을, 셋째는 유니우스 브루투스(Junius Brutus)가 자기 아들들을 바친 사건이다. 이 세 아버지는 전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식을 바쳤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비극의 영웅'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었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입다, 브루투스는 '비극적 영웅'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개인의 신앙을 증명한 아브라함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성모 마리아: 종교적 실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것과 무관하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만의 사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증거'를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입증해야만 했다. 결국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윤리적인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이 윤리적인 것을 따랐다면,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 윤리적인 것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했을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곧 아브라함에게는 시험이었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범주가 필요하다. 언어로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속하는데, 아브라함은 이 시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른 비극적인 영웅처럼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울어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행위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단독자인 아브라함은 절대자인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이게 역설이다. 그는 보편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고, 다만 단독자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영웅적이지 않지만,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그 동기와 기원은 영웅적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돌려받은 그 결과로 인해서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를 영웅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 행위와 관련된 불안, 번뇌, 역설을 통과한 것이 위대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성모 마리아가 위대한 것과 유사하다. 마리아의 고통은 개인적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순종했을 뿐이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사적인 일이었다. 이게 종교적 실존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이신 아기를 출산했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신앙은 정열이다. 정열은 모든 인간의 삶을 통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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