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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Nov 26. 2021

키에르케고어의 장례식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1회

키에르케고어의 장례식, 1855년 11월 18일, 일요일


1855년 11월 18일, 그의 장례식에는 성직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키에르케고어는 모국어를 깊이 사랑했고 산책을 즐긴 사람이다. <순간>이란  주간지의 최종호 작업을 하다가 의식을 잃고 집에서 쓰러졌다. 조금 회복되었을 때 평소 즐기던 산책을 나갔다가 1855년 10월 2일, 화요일 거리에서 쓰러져 프레제릭 병원(Royal Frederik's Hosptal)의 '뮌스터 병동'에 입원했다. 들어설 때 "나는 여기에 죽으려고 왔다"고 말했다.


키에르케고어는 11월 11일, 42세 나이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코펜하겐의 가장 중요한 교회인 후루에 교회(Our Lady Church 성모교회, 덴마크어로 Frue Church 후루에 교회: 이곳에 감독이 있는 대성당이다)에서 엄청난 군중이 자유로이 모여 일요일인 11월 18일에 장례식을 거행했다. 죽은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가족장으로 할까 아니면 대중적 장례식으로 할까 가족이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주교 마르텐센은 어디 있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장례식에는 설교를 맡은 형 페터(Peter) 키에르케고어와 예식을 주관하는 부감독 트루에(Egger Christopher Tryde) 이외에는 목사가 한 사람도 없었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후루에 교회에서 일요일 장례를 치르는데 성직자는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그 상황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형 페터가 설교하고, 교회 주인으로 부감독이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대주교 마르텐센(Martensen)은 어디 숨은 것일까? 마르텐센은 키에르케고어보다 6살 위이고 그의 신학교 선생이며 그 당시 덴마크의 대주교이다. 그의 방에 달린 창문을 통하여 거행되는 키에르케고어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는 방에 있으면서도 안 나온 것일까? 아니면 못 나온 것일까? 이 장례식은 원만히 진행되지 않았고 긴장감이 감돌았고 한 차례 소동도 있었다.


키에르케고어는 논쟁의 중심에 선 삶을 살았다. 철학자들은 그가 삶의 의미와 실존과 시간의 본질을 밝힌 점을 칭송했고, 시인과 극작가는 그의 신선한(provocative) 상상력을 칭송했다. 덴마크 소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동화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dersen)이 그의 친구이기도 하다.


보수 쪽에서는 혁명과 미성숙한 민주정을 반대한 그를 좋아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전통의 권력에 항거하여 개인과 일반인의 자유를 주창한 그를 좋아했다. 무신론자는 성직자와 제도적 종교를 비판하는 그를 사랑했고, 덴마크 국교회의 갱신을 갈망하는 개혁가 역시 성직자와 제도적 기독교를 비판하는 그를 좋아했다.



키에르케고어의 묘비명


키에르케고어 생애와 사상을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의 죽음 이야기로 첫걸음을 내딛는니다. 그의 죽음과 묘비명을 소개하면서 그의 삶과 그 시대를 상상해보자.


이제 잠시 후에  나는 승리하리라.

그 때 모든 싸움은 곧 끝나리라.       

그 때 나는 장미나무 그늘에 앉아

나의 예수님과 영원히 영원히 이야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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