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하늘연달
2057년 어느 날, 우리의 아침은 각자의 생체 리듬에 맞춰 시작된다.
가장 편안하게 일어날 수 있게 유도 기상이 진행된다. 미적미적 안방을 나서면 아침 식단과 알약 하나가 준비된다. 약의 발전으로 매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혈압약을 찾아 먹을 필요도 없어졌다. 기술의 발전이 이렇게 까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란 것을 2024년에는 몰랐다.
세상은 더욱 살기 좋아졌다. 노동의 대부분을 로봇이 대신해 주고 있고, 진보된 기술만큼이나 우리는 많은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먹고 싶은 메뉴를 떠올리면, 굳이 별다른 지시 없어도 로봇이 우리의 식사를 만들어 준다. 외출 시에도 외부 온도를 고려하여 AI 집사가 추천해 준 옷을 입고 나간다.
오늘은 갑자기 추워질 것이라는 이야기에 의아했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 살짝 움츠러든 나를 보며 기술의 발전에 다시 한번 경외를 표한다.
저 멀리 나의 손주들이 전용선을 타고 오고 있다.
이렇게 기술이 진보된 상황에서도, 나와 남편은 여전히 우리의 부모님이 했던 것과 같은 황혼 육아를 하고 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비나리는 유독 자동차를 좋아했었다. 기어 다닐 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한 자동차를 마침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차만 보이면 달려갔다. 주차된 차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가끔은 찻길로 달려들려고 해서 나를 많이 놀라게 하였다. 덕분에 나는 비나리와 밖에 나갈 때마다 늘 애를 먹었다.
그러나 35년이 지난 지금은 찻길로 뛰어들 아이들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된다. 우선 뛰어들 찻길이 없어졌다. 교통수단이 진보해 차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대중교통이 주를 이루던 과거와 달리, 가족 단위의 전용선을 이용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많은 것들도 비나리의 상상대로 이루어졌고, 나아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기술들도 많이 등장했다.
이러한 기술은 ‘육아템’에도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비나리가 부모가 된 지금, 아이가 열이 나더라도 밤을 지새우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실시간으로 아이의 건강 상태와 열을 체크해 해열제를 먹을 타이밍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깨워주는 IoT 시스템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에서도 진보하던 아기띠(10월 글 참조)는 마침내! 허리에 전혀 무리를 가하지 않고, 아이를 업을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되었다. 출산한 엄마들의 필수품과 같았던 손목 보호대와 허리 보호대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많은 건설가들의 노력으로 연구된 ‘소음 없는 집’ 설계가 발표된 이후 아이들로 인한 층간소음 문제는 사라졌다. 그 덕분에 나의 손주들은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주택가 마당에서 뛰어놀았던 것처럼 집안에서도 마음껏 뛰어놀고 있다. 비나리와 비나리의 동생이 방에서 뛰어놀 때마다 조마조마했던 것과 달리 요즘은 우리도 집안에서 가벼운 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육아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아이템뿐만 아니라 ‘육아 방식’에 대해서도 꾸준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육아를 미래 기술에 모두 맡기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두 아이에게 시달리며 육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시절, 나는 먼 미래에는 빠른 속도로 진보된 육아템들 못지않게, 육아를 대신해줄 ‘육아 도우미’가 등장할 것이라 상상했었다. 2057년 부모의 양육방식대로 아이를 돌봐줄 이 ‘로봇 시터’가 판매되고 있지만, 상상처럼 완벽하지 못했다.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사람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아이와 보내도,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진짜 부모와의 교감이기 때문일까. 흔들림 없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트림 유도 및 수면 유도 바운서보다 서툴고 비규칙적으로 흔들어주는 엄마의 품을 여전히 더 좋아하는 신생아들만 봐도 그렇다.
어느 기업에서는 얼굴 변신이 가능한 ‘로봇 시터’를 출시하였고, 로봇 시터는 엄마의 얼굴로 변신해서 아이에게 다가갔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엄마 흉내를 내는 로봇들에게 반감을 가졌으며 엄마와 로봇을 분리하기를 원했다. 수많은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유들로 인해 육아의 방법은 여전히 과거와 유사한 방법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의 따뜻한 말과 때로는 따끔한 훈육으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직접 배우고, 아이들끼리 만나 서로 교감하고 질서를 배워가는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모의 존재를 기계화로 바꾸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도 ‘육아’만큼은 로봇에게 전적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덕분에 하나 더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황혼 육아’이다. 나 역시 힘들게 육아를 해냈지만,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나보다 체력적으로 더 힘들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손주 돌보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 사랑이 고생하는 자식을 더 챙기기 위한 것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그와 동시에 한 세대의 부모가 미처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 알려줄 좋은 기회라는 것을 이제야 몸소 체험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비나리를 통해 나를 키우시던 시간을 많이 추억했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 손주들을 통해 우리 비나리의 어릴 적 모습들을 많이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비춰보고 있다. 부모가 된 비나리도 자신의 아이들과 나를 보며 과거의 내가 부모님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 완벽하지 않은 기술로도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들을 충분히 잘 키워주셨으며, 우리는 그보다 나아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아이들을 키워왔다. 나아가 우리 아이들은 우리 때보다 더 발전된 기술의 도움을 받아 기술적으로는 더욱 편리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육아템의 발전처럼 육아하는 방법도 점점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기술의 진보도 여전히 부모를 대체할 수는 없으며, 그렇기에 ‘육아’는 사람들이 직접 관여해야 하는 부분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이들의 육아는 여전히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듯이 말이다. 지금보다 더욱더 먼 미래가 되어 더 많은 기술이 발전되고 육아 방식도 지금과는 또 다르게 변화할지라도 부모의 역할 자체는 늘 그대로이지 않을까?
- 비나리의 육아일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