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늘연달
1987년 어느 봄날, 한 여자가 배를 부여잡으며 급하게 택시를 탔다.
아이가 나올 거 같다는 다급한 말에 택시 아저씨는 빠르지만 안전하게 차를 몰았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발의 차로 아기는 택시가 아닌 병원에서 태어날 수 있었고, 그 아기는 별 탈 없이 병원에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자라면서 부모에게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순간은 큰 기쁨을 주었지만, 때로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놀람을 느끼게도 해주었고, 또 가끔은 눈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속상함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그렇게 부모에게 효도와 불효를 번갈아 가면서 하던 아이는 어느덧 자라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와 나의 엄마의 이야기이다.
엄마는 내가 출산하는 동안 옆에서 나의 아픈 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고, 이후 조리원에 들어갔을 때도 편히 몸조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응원해 주셨다. 정작 본인은 두 번의 출산에도 불구하고 ‘조리원’이라는 곳에 가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 시절 엄마들에게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면서 몸 회복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는 자기 몸보다 아기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출산 방법 선택에서도 지금과는 달랐다. 한때는 ‘자연분만’이, 조금 지나서는 아이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왕절개’가 유행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자연주의 분만’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발전된 출산 기술과 리서치 논문들만큼, 언론을 통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공유되고 유행하였고, 그 시기 엄마들은 전문가 의견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산 방법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요즘의 엄마들은 전문가의 말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원하는 만큼 언들 수 있고, 여러 경험담을 직접 경험자를 통해 얻을 수 있기에 유행보다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선택하거나 개인의 철학에 따라 소신껏 선택하고 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제왕절개가 유행했던 때는 모든 선택의 기준이 ‘아이’가 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때는 임산부 영양제들도 대부분 아이의 건강이나 발달과 관련된 것이 추천되었다. 특히 커피같이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아이의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로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음료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양한 과학적인 근거들이 발표되고 더불어 임산부가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무작정 아이를 위해 참는 것보다 하루 한 잔의 커피가 아이나 산모에게 더 좋다고 하기도 하며, 태교 음악의 경우도 과거 조용한 클래식 위주로 선택되는 것과 달리 요즘은 삼모의 취향에 맞는 음악이 추천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출산 선물의 경우도 과거엔 아이를 위한 선물이 많았지만, 요즘은 산모들을 위한 선물 종류도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선택지에서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면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엄마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남편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님과 보냈다고 했다. 그 시절 맞벌이 부부셨던 어머님이 혼자 연년생 남자아이 둘을 키우기란 쉽지 않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님은 과감히 안정되고 좋은 직정을 포기하셨고, 혼자서 두 아들을 기워내셨다. 아버님은 그 시절의 대부분의 아버지와 같이 육아에는 관여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대신 열심히 가족을 위해 돈을 버셨다. 어떻게 보면 그 시기는 남녀역할이란 것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과거에 남자가 아이를 보고 있다면, “저 집 엄마는 애를 안 보고 어디 갔대. 왜 아빠가 애를 데려왔지?”하면서 마치 하면 안 될 일을 한 느낌이라면, 지금은 “우와, 저 집 아빠는 아이랑도 잘 놀아주고 엄청 다정하구나. 엄마는 좋겠네.”라고 칭찬하는 말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남자들도 육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아직 비율은 적지만, 아빠가 육아를 전담하는 집의 비율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의 아이들은 ‘엄마가 무조건 애를 봐야 해.’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은 세대에 태어났다. 그 덕분에 나 또한 일을 그만 두지 않고도 육아를 할 수 있고, 남편도 나와 유사한 비율로 육아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아이를 돌보며 일을 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인식 때문에 일을 포기하는 일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 인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일까? 아버님은 뒤늦게 손주 육아에 참여하시면서 기쁨을 느끼시고 있다. 정작 본인의 아이들이 클 때는 관여할 수 없었지만, 손주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과 아이들 육아 방법에 대해서도 따로 공부하시는 아버님을 보시고 어머님은 종종 놀라시기도 한다.
다시 1987년, 내가 처음 집으로 왔을 때 우리 집은 매우 복잡하고 분주했다. 몸조리할 겨를도 없이 엄마는 온종일 젖병을 삶고, 똥 묻은 천 기저귀를 맨손으로 빨고 삶아 널었다. 그리고 하루에 서너 시간은 아이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썼다.
엄마는 이 분주한 모든 순간에 나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있었으며, 나는 엄마 등에 매달려 고된 살림을 해 나가시는 엄마를 느꼈고, 커가는 언니의 행동을 살피며 따라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엄마에게는 포대기가 가장 고마운 육아용품이었다고 하셨다. 또한 그 시기엔 우리 부모님들에게 놀이터가 유일한 육아도우미였다. 무료였으며, 당연히 시간제한도 없었다. 아이들은 오로지 배꼽시계에만 의존해 매구 샘솟는 체력을 열심히 고갈시켰다. 물론 나도 내 의지로 보행을 시작한 이후에는 매일 언니를 따라 놀이터로 향했다.
지금은 많은 육아용품이 부모들에게 상대적으로 편리한 삶을 보장해주고 있다. 매일 빨아 쓰는 천 기저귀 대신 일회용 기저귀가 많이 보급되었다. 가격도 과거에 비해선 합리적이고 각종 환경호르몬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들이 많이 생겼다. 또한, 바쁜 현대인을 위한 일회용 젖병도 나왔으며, 버튼 하나만 눌러도 완성된 분유가 나오는 ‘분유 포트기’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가 서너 시간 동안 만들던 이유식도 이제는 원하는 메뉴로 원하는 양만큼 주문하여 배달받을 수도 있다. 편리한 세상이 왔고, 이러한 육아 환경의 진보들이 부모에게 조금이나마 여유를 선사한다.
엄마의 최고의 육아용품인 포대기 또한 진보하였다. 뒤로만 업는 것이 아니라, 앞 보기/뒤 보기 등 자유자재로 업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만능 아기띠도 있다. 심지어 요즘은 부모의 허리 건강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어 장시간 사용에도 무리가 없다.
걷기 시작한 아기들은 눈비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해 아쉬워했던 우리와는 달리 놀 곳이 생겼다. ‘키즈카페’는 넘어지거나 부딪혀도 쉽게 다치지 않게 쿠션으로 이곳저곳을 감싸 놓았다. 이곳에는 각종 놀이기구는 물론 테마별로, 연령대별로 골라서 입장이 가능하다.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혹여나 다칠까 긴장하지 않고 커피 한 잔의 여유도 허락한다.
우리 부모님은 매우 바쁘셨지만, 일과 후 모든 시간을 언니와 나에게 투자하셨다. 그리고 부모님은 구멍 난 옷에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 드셨지만, 우리만큼은 깨끗한 옷에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최대한 사주시려고 노력하셨다.
유명한 노래처럼 우리 엄마도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대신 짜장 소스는 좋아하셔서 언니와 내가 면을 다 먹고 남은 소스에 밥을 비벼 드셨다. 그때는 왜 우리 네 식구가 짜장면을 두 그릇밖에 시키지 못하는지 몰랐다. 욕심 많은 내가 다니고 싶다던 학원을 두 개나 보내주셨으면서도 학원비 내는 날에는 늘 근심이 가득했던 어머니는 내가 따온 컴퓨터 자격증들을 보시면서 누구보다 뿌듯해하셨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IMF라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언니와 나만큼은 어려움 모르고 살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의 희생을 알게 되었다.
의식주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외벌이 가족에서 맞벌이 부부가 많아졌으며, ‘1인 1 짜장’ 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왔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19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위기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어려움 없이 자라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것은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언젠가 꼭 너 같은 아이를 키워보렴.” 하던 엄마의 말대로 나는 2019년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빨리 세상으로 나오려는 호기심 많고 개구쟁이 같은 아이를 낳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같은 공간을 살고 있지만, 각자 다른 시기에 육아를 했다. 육아의 방법은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치 않는다.
나는 우리 개구쟁이들 때문에 여전히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내가 느끼는 이 좋은 감정들을 우리 부모님들도 나와 언니를 통해 느끼시지 않으셨을까?
- 비나리의 육아일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