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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Jun 04. 2024

주모와 나는

2024.05.29. 수

     

<주모와 나는 아마>     


내가 자주 가는 주막의 주모는

솜씨가 좋아 맛난 제철 안주를 잘도 내놓겠지만

내가 주인인 주막은 아마

특색은 없지만 가짓수는 많을 것이다    

 

내가 뻔질나게 드나드는 주막의 주모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느냐고 혀처럼 놀겠지만

내가 맞이하는 손님에게는 아마

가만히 옆에 앉아 찰지게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이다     


내가 어깨깃 세우고 친구들 앞세워 자주 찾는 주막의 주모는

안주가 바닥을 보이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새것으로 올리겠지만

내가 휘청이는 단골손님을 볼 때면 아마

이제 그만, 좀 작작 마시라 할 것이다     


내게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지? 멍하게 떠올리는 주모는

인생 뭐 있다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했겠지만

내게 와 다 털어놓고 홀쭉해져 나가는 그에게 아마

가볍게 등 두드려 주며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해주겠네     


     

학생부 잘 써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건우는.

선생님 책 잘 읽고 있다며, 책상 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내 책을 올려놓고 있다.

그럼, 정채봉 시인과 고등학생 아빠가 무릎 맞대고 앉아 거나하게 막걸리잔 기울이고 있겠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는다고 했던가?

나는 가고 내 책은 남아 못다 한 이야기 마저 하고 있겠네.

이별은, 기쁜 이별은 없다.

늘 아쉽고 슬프다.

손으로 가득 퍼 올린 모래같이 제법 눈에 보인 추억이라는 놈도

어느새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인수인계할 선생님이 오셨다.

왜 꼭 내 자리를 물려주는 것 같지?

그분의 자리를 내가 잠시 앉아있었을 뿐인데.

건강이 회복되셨다니 다행이다.

손댈 것 없이 학생생활기록부에 넣을 내용은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진도만 알려주면 끝.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기고 부서의 업무를 전달받는다.

부장님의 당부가 길어진다.

내게는 주지 않았던, 본인이 손수 하셨던 저 많은 일들.

수업하랴, 업무 하랴 또 아프시지는 마세요.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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