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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Aug 10. 2024

숨은 고수들

2024.06.14. 금

 <숨은 고수들>

    

앞 학교로 통하는 후문과 남자 화장실 비밀번호가.

10004*

모든 일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만사형통.

7시 40분에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제일 먼저 에어컨을 켜고 시원하게 해 놓는다.

교문에 나가지 않으니, 이것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퇴근은 선생님들보다 정확하게 10분 먼저. 

프로그램 운영 강사님보다는 늦게, 선생님보다는 빠르게.

내 위치는 정확하게 안다.

교무회의가 있는 날은 눈치껏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센스.

퇴근의 기쁨의 농도를 내가 깎아 먹어서는 안 된다.


여름에는 제일 더워하는 사람을 위주로 에어컨을 켜야 하고, 겨울에는 제일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온풍기를 켜야 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국제혁신교육부장님.

무슨 개똥철학?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부럽고, 거칠 것 없는 생각이 무섭기까지 하다.

저 가녀린 여인의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올까?     


수업 시간 5분 전에 반드시 교실에 들어간다.

“정명태 선생님, 우리 아빠가 술 먹을 때 자주 먹어요.”

와 하고 웃는 아이들.

“오래 크게 살라고, 정영태 선생님.”

빙 둘러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바글바글 끓는다.

자신들의 말로 떠들다가도 내가 들어가면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말을 한다.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다른 반 아이들.

수업은 반드시 시작종이 울린 후 시작.

이항에서 이는 둘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사 이동처럼 옮긴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이항은 항을 옮긴다는 말이다.

항을 건너편으로 옮기면 부호가 바뀐다.

왜?

당근을 내밀면 우르르 달려오는 제주도 목장의 말들의 눈빛. 

같은 것을 더하거나 빼도 같다는 것을, 한 과정 건너뛴 거야.

고개를 끄떡이기는 하지만 내 핏대에 대한 예의가 대부분.

수현이와 다니엘은 몇 단계를 뛰어 암산으로 풀고 있다.

“수현이는 학원에 다녀요. 이차방정식도 풀어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니 욕심이 대단한 녀석이다.

한국말이 서툰 칸의 후예 다니엘은 숨은 고수다.

눈썹이 말려 치켜 올라갔고, 발달한 턱뼈구조, 잘 웃지 않은 자존심까지.

언어만 트이면 무궁무진한 발전이 있을 것 같다.

목이 두꺼운 장사 차현민.

유라시아 벌판에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잡고 있을 우람한 덩치.

풀이들을 보니 거의 목적지에 다 왔다.

새로운 문제로 세 문제를 더 풀고 나서야 환하게 번지는 미소.

됐다, 이놈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 내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겠는데 말이지.     


급식실 앞, 길게 늘어선 줄.

1반의 껄렁이가 나오자, 러시아 천사가 살짝 뒤로 빠진다.

어깨를 잔뜩 세우고 눈에 흰자를 많게 위로 뜬 사고뭉치.

저 녀석 큰일 낼 놈이다.

덩치는 작지만, 기운이 다르다.

말이 통한다면 오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혼자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는 꺽다리 1학년.

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비학교 프로그램을 듣는 중.

옆 반의 두 아이와 함께 듣고 싶다고, 통사정한다.

“너의 수준을 올려라. 그 아이들이 답답해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테스트를 해보겠다.

입장은 이해했고, 충분히 고려해 보겠다는 혁신부장님.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녀석, 저놈 오늘부터 밤 세겠다.

아무리 작은 웅덩이에도 1등 미꾸라지는 있고, 그것을 지키는 데는 온몸을 불살라야 한다.

먼 이국땅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 모른다.

내가 저런 입장이었다면?

구석에서 기도 못 펴고 한탄만 하고 있었을까?

혹 다른 방도가 없는지 눈을 번뜩이고 있었을까?

칭찬을 듣기 위해 밤잠을 반납하고 발버둥 쳤을까?                              



<나중에>     


나중에

언제 한 번

꼭 

봐요     

가느다란

이어짐마저

없으면....  

   

나중은

꼭 

오는데

오고야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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