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 들어서다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과 마주쳤다.
어?
응, 하고 가!
우린 이렇게 두 마디 주고받고 하나는 들어가고 하나는 나갔다. 어? 응, 하고 가! 이게 날마다 얼굴 맞대고 사는 부부가 밖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주고받는 말인가. 아무 데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늙다리 아저씨를 보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니고 아빠라면 아빠와 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 아빠아! 음, 지금 오는구나. 그래애, 하고 와. 이런 식으로 서로가 몇 마디 더 했을까?
우리 아버지와 마주쳤다면 나도 좀 더 따스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을까. 어! 아버지... 음... 조심해서 가세요. 등등.
오십 대일 때 육십 대 형님들한테 남편하고 대화가 안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만 해도 남편에게 애정과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남편하고 무슨 대화를 하니? 그냥 밥이나 챙겨줘. 쯧쯧. 그럼 남편하고 대화 안 해요? 얘 웃긴다. 55년 이전 출생 남자들은 안돼. 괜히 애쓰지 마 ...
이제 나도 그 나이가 되었다. 더 이상 애쓰지는 않지만 밥만은 열심히 차려준다. 왜? 이따금 남편이 없으면 큰일 날 일이 생긴다. 남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비상사태가 생각지도 않게 벌어져 남편 없이는 못 살겠구나 실감할 때가 있으니 애정과 상관없이 남편에게 밥이라도 잘해먹여야 한다는 것은 남편 사용설명서의 첫 번째 조항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 오고 얼마 안 있어 천장에서 난리가 났다. 우당탕 투두둑 탁탁... 엄마야. 이게 무슨 소리야. 낮에 혼자 집에 있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3층 화장실 천장 쪽 밖으로 난 벽에 틈새가 있는지 쥐 몇마리가 들어와서 거실 천장까지 신나게 달리기하는 중이었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빨리 집에 와. 왜? 아 그냥 오라고. 무서워 죽것어.
남편은 쥐가 뭐가 무서우냐고 관리실 가보라는 둥 바쁘다는 둥 하면서 저녁때 왔고 주말이 되어서야 소동은 가라앉았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는 얼굴로 남편이 화장실 천장을 열고 쥐구멍을 막고 끈끈이를 몇 개 넣고 이젠 절대 못 들어와 하면서 큰소리쳤는데 그 후에도 쥐 소동은 몇 번 되풀이되었다. 한번은 남편이 어디 갔었는지 할 수 없이 관리실 아저씨를 불렀다. 천장에서 끈끈이에 잡힌 쥐를 꺼내면 접어서 바로 넣어달라고 화장실 문 앞에 쓰레기봉투를 벌려놓고 나는 안방으로 피했는데 그 아저씨가 현관으로 나가면서 다 했다고 소리쳤다. 후유우! 이제 살았네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아무 생각 없이 방에서 나오는 나를 향해 그는 한 손으로 쥐꼬리를 거꾸로 잡아흔들며 씨익 웃었다. 그때 결심했다. 절대로 이혼은 안돼. 또 쥐 들어오면 어떡하느냐고. .... 그게 십 년도 전의 일이고, 우리가 한동안 서울로 이사 갔다가 들어오면서 화장실과 주방 인테리어 공사를 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지난 주, 아침에 일어나는데 어디선가 덜그럭덜그럭 쿠당탕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위층에서 가구를 옮기나 보다 생각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오! 아니었다. 엄마야! 큰일 났어. 또 들어왔어! 나는 비명을 질렀고 어떡하느냐고 방방 굴렀다. 들어보니 이건 작은 게 아니었다. 꽤나 큰 것이 벽 틈새로 난 구멍을 통해 들어왔다가 아마도 오래전에 천장 바닥에 깔아놓은 끈끈이에 붙은 모양인데 나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데 그게 될 일인가! 남편은 나보고 집게와 의자를 가져오라 했다. 당장 꺼내겠다는 것이다. 나 못해. 죽어도 못해. 살아있는 걸 어떻게 꺼내. 혼자 하던지. 혼자 어떻게 하니? 그럼 기다려, 지쳐 죽을 때까지.... 나는 관리실로 가서 현관 쪽 화단에 제발 쥐약 좀 놓으라고 했다. 전에도 말했었는데 관리실에서는 쥐약 놓으면 개나 고양이가 먹는 수가 있어 주민들의 항의가 들어와 함부로 못 놓는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었다. 그럼 쥐 들어올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꺼내줄 수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화장실이 조용해진 후 공사가 시작되었다. 틈새 구멍을 막을 수 있는 납작한 돌멩이와 철판 조각, 다이소에서 사 온 청색 테이프와 끈끈이를 준비하고 남편은 천장을 열었고 나는 공사하는 남편이 떨어지지 않게 두 겹으로 쌓은 의자를 꼭 붙들었다. 족히 한 시간이 넘게 걸렸고 쥐를 꺼내는 동안 나는 밖으로 도망갔다. 서방님 오늘 너무 고생했슈. 저녁에 뭐 맛있는 거, 피자라도? 남편은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피자 시켜! 가족 단톡방에 오늘의 대 공사 내용을 올리고 이건 오로지 남편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더니 시집간 딸이 옳소 하고 맞장구를 쳤다. 칭찬에 고무되었는지 피자를 먹다 말고 남편이 내일 공사를 다시 해야겠다고 했다. 뭘 다시 하냐고 속으로 괜히 칭찬했나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은 다음날 다이소에서 철망 비슷한 걸 사 와서 어제 한 공사를 다 뜯어내고 완벽하게 해야 한다면서 뭔지 모르지만 다시 했다.
내가 딸이라면 남편이 아닌 아빠를 어떤 눈으로 볼까? 남편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라면 끓이기인데 지난번 시골에서 시어머니와 일주일을 보내고 와보니, 가볍고 작으면서 꽤 예쁘기도 해서 내가 아껴 쓰는 나무 도마가 앞뒤로 시커멓게 타있었다. 남편이 라면 끓일 때 손에 잡히는 데로 이 가벼운 도마를 냄비 뚜껑 대용으로 쓰다 보니 가스불에 둥글게 탄 것이었다. 에고, 우리 아빠 쫌 웃긴다!
라면을 먹은 다음 냄비의 라면 국물을 다 버리고 개수대에 넣어야 하는데 이 남자는 국물 채로 설거지통에 넣어 큰 설거지를 하게 한다. 말해도 소용없고 자신이 설거지를 안 하기 때문에 관심 없다. 아유! 우리 아빠 쫌 그러네?... 이러고 말까? 그 애는 일 년에 한두 번 만 보면 되니까 웃고 말면 된다.
한평생을 같은 사람과 쉬임없이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안 변하고 그도 안 변한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올때가 있다는데 지금 내가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온 간을 도로 집어넣고, 속에 있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남편 사용설명서의 핵심이다. 물론 남편도 아내 사용설명서를 숙지해야 한다. 기나긴 백세시대를 동행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