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만 할 줄 아는 사람의 빵 취향에 관한 (2)
나는 당대사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먹는 것을 늘 의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로리를 극단적으로 제한해야 하는 사람은 아니고, 비건을 선택해야 할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며, 글루텐을 피해야 할 몸도 아니다.
이 문장들을 나열하고 보니, 나라는 사람의 조건이 조금 또렷해진다. 나는 ‘조심해야 할 것은 있지만, 대체해야 할 이유는 없는 사람’에 가깝다.
그런데도 한동안 나는 비건 디저트를 기웃거렸다. 비건으로 만든 케이크, 떠먹는 디저트, 견과류로 버터와 크림을 대신한 것들. 아마도 건강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득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말에 대한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비건 디저트는 종종 이렇게 소개된다. 비건인데도 맛있다고.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비건 디저트가 꼭 필요한 사람들도 있고, 그 선택에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다만 오늘 나는, 그 선택이 나에게는 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오늘 먹은 떠먹는 케이크에는 견과류가 많이 들어 있었다. 땅콩버터와 아몬드 가루가 뭉쳐진 토핑, 그리고 통째로 얹힌 피칸. 나는 견과류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미 입 안이 뻑뻑해진 상태에서 피칸이 한 번 더 씹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맛의 좋고 나쁨 이전에, 먹는 행위 자체가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 확, 하고 와 닿았다.
여기에 커피 크림과 캐러멜 크림, 그리고 콩에서 비롯된 맛이 겹치자 삼키는 일이 갑자기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디저트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적게 먹더라도 분명하게 즐길 수 있는 디저트를 좋아한다. 먹는 순간만큼은 애쓰지 않고 싶고, 씹을수록 더 힘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입 안에서 끈적임이 늘어나지 않고, 삼킨 뒤에도 부담이 남지 않는 쪽이 좋다.
그 기준으로 돌아보니, 나는 굳이 대체된 재료들 위에서 맛을 설득당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비건 디저트는 필요한 사람에게는 분명히 의미 있는 선택이다.
윤리, 신념, 알러지, 혹은 삶의 태도.
그 어떤 이유로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선택이 조건이 되지 않는다. 나는 대체 설탕을 찾지 않아도 되고, 대체 버터로 만족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맛을 양보하면서까지 그 길을 갈 필요도 없다.
돌이켜보면, 이건 갑작스러운 판단이 아니다.
어느 순간 조용히 대사 이상이라는 것이 다가와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예전과는 다른 형태의 허기와 폭식으로 기울 수 있는 조짐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밀어내려 할수록 더 큰 반동으로 나를 옥죄는 굴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런 상태의 나 역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취향을 조금씩 확인하는 시간.
무엇이 즐거운지, 무엇이 버거운지, 어떤 순간에 몸이 먼저 고개를 흔드는지. 떠먹는 케이크에서, 크럼블에서, 크림과 앙금이 섞인 질감에서, 그리고 비건 디저트 앞에서도. 그 모든 경험은 실패라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조용히 비건 디저트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알 것 같아서다. 이것은 어떤 것을 거부하는 선택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취향의 기록 위에서 내린 또 하나의 결론이다. 나는 대체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진짜를 조금 먹고, 몸의 반응을 살피며, 좋아하는 맛을 정확히 고르는 쪽을 택한다. 디저트 앞에서까지 나를 설득하거나 시험하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존중하지만, 선택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그래서 단정이 아니라 정리다. 그리고 이 정리는 생각보다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