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지난 1월에 인천 서구 검단에 있는 한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5개월째 살고 있다. 인천 효성동 두산 아파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서 여러 곳을 거친 후 일산에서도 한참을 거주했었다. 그리고 다시 인천 청라로 돌아왔고, 금년에 검단신도시에 있는 8번째 '살 곳'에 머무는 중이다. 이렇게 총 8군데의 '아파트'를 거치면서 25년간 메뚜기처럼 주거지를 옮겨 다녔다. 그 25년 중에서 11년은 일산에서 나머지 14년은 인천에서 보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한 곳에서 무료해질만 하면 거처를 옮겼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결코 무료해서 이사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거주했던 곳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을 꼽자면 단연 '일산'이다. 그래서 그 곳에서만 1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아이의 교육 문제와 거주 편의성 등 다양한 이유로 그곳에서 살았다. 비록 내가 거쳐온 8군데의 아파트는 모두 본질적으로 내가 살고 싶은 형태의 거주 공간은 아니긴 했지만 그나마 일산은 내가 살고 싶은 형태의 거주 공간이 아닌 '아파트'의 형태였음에도 환경적인 측면에서 내가 '살고 싶은 곳'과 유사한 특성이 다수 있었다. 이것이 오래 거주한 이유이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내가 처음 살기 시작한 2009년도만 해도 일산은 매우 조용하고, 공기도 꽤 맑았다. 사람들로 붐비지도 않았다. 지금도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에도 생활편의 시설이나 문화 공간이 근거리에 다수 존재했고, 공원과 같은 휴식 공간은 집을 나서기만 하면 바로 만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아파트 가격도 저렴했다. 물론 북쪽과 가깝다는 지리적 단점, 불편한 강남 접근성 그리고 아무래도 경기도의 북쪽에 있다보니 경기 남부로 이동할 때 대중 교통이든 운전을 하든 시간이 꽤 많이 걸리는 단점도 있었다. 90년대 초에 지어졌기 때문에 아파트 자체도 상당히 노후화 되어있기도 했다. 이런 단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관점에서의 '살고 싶은 곳'에 해당하는 장점이 더 많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이 저술한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의 내용 중에 '사람이 살 만한 곳'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책 내용중 복거총론(卜居)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그는 적절한 입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그리고 산수의 네 가지를 꼽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살만 한 곳은 땅과 산 그리고 물과 같은 지리적 조건(배산임수)이 좋아야 하고, 그 땅에서 좋은 것들이 생산되어야 하며(비옥한 토질과 적당한 기후), 좋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야 하고(인심과 정) 마지막으로 자연 경관이 우수해야 한다. 이런 모든 조건들이 부합 할 때에야 비로서 그곳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된다는 말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오래 살 곳은 되지 못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시대적으로 그 당시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모든 조건에 맞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풍류나 즐기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4가지 중에서 절반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이중환이 말한 복거(卜居), 즉 '오래 머물러 살만한 장소를 가려서 정하는 법'에 따른 살 곳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현실적으로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차례가 가기는 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중환의 시대에서 생각하는 '복거'의 조건만 생각한다면 찾기 어렵겠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이중환이 살던 시대의 '환경이나 삶의 형태'와 지금 시대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이 시대에 맞는 복거의 기준을 다시 살펴본다면 '살 만한 곳'을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인 지리적인 조건은 조선시대 때나 지금이나 별차이가 없다. 우리나라 국토의 70% 이상은 산이다. 비록 집이 산을 바로 등지고 있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창문을 열면 앞이든 뒤든 다 산이 보인다. 아마도 집의 앞뒤로 다 산이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짙은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가 짧아져서 잘 보이지 않을 수는 있어도 아무튼 산은 우리가 주변에서 매우 쉽게 접근하고 볼 수 있다. 사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집이 좋은 이유는 인간의 생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을 등지고 있음으로 해서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며 동시에 여름의 뜨거운 열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배산'은 어쩌면 바로 옆 혹은 뒷 동과 아파트 단지내의 풍성한 조경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변 건물이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며 단지내의 녹색 환경이 더운 열기를 대량으로 흡수해 주니 말이다. 물론 풍수에 따른 너무 엄격한 기준이라면 말도 안되는 관점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배산 임수의 임수, 즉 물 또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풍수에서 말하는 배산임수가 거주 조건에 중요한 이유는 취락의 조건과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 뒤에서 산이 바람을 막아주면서 거주 환경을 안락하게 해주고, 집 앞쪽에는 물이 있어서 언제든지 생계를 이어가는 활동(농사)에 지장이 없는 것이 좋은 취락지의 조건이다. 농경 사회에서는 자연으로 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고,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물)를 얻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물의 존재는 그 존재로부터 특별한 무언가가 나와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순전히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현대화 혹은 산업화가 완전히 진행된 이 시대에는 물이 거의 삶의 장애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농사도 짓지 않는다. 심지어 물도 약간의 돈만 내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고, 내 집 앞에 시냇물이 없어도 어제나 푸른 야채를 시장에서 사다 먹을 수 있다. 배산임수는 풍수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여전하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이 시대에 적용할 배산임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모든 집에 수돗물이 나온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물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생리적 조건으로 '땅에서 좋은 것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미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좋은 땅에서 생산된 좋은 것'을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 백화점, 마트, 그리고 재래 시장이 그것이다. 우스개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럴 것이다. 이중환이 말한 두 번째 조건은 농업이 주 산업이던 그 시대에 맞는 조건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 맞는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신토불이'라고 쓰여진 좋은 상품을 하루면 집 문앞으로 배송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아파트던 일반 주택이던 백화점이나 마트 근처에 있는 집이 일반적으로 더 비싸다.
세 번째로 인심, 즉 '좋은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 같다. 너무 비약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 사는 곳에 살고 싶으면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유상종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도 주변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격이 높고 포용력 또한 높은 '좋은 사람'이면 주변에 그렇지 못한 사람의 부족함을 수용할 품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도심에서는 흉폭한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지방에서도 갈수록 정이 매말라가면서 인심은 전반적으로 햐향 평준화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경쟁 사회에서 '인심'만 쓰다가는 도태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엄청난 경제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부작용이 바로 '인심을 잃어가는 세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흉악한 사람보다는 사람다운 사람이 더 많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회가 질서있게 운영될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사람, 배려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풍광이 좋아야 한다는 조건의 경우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너무 산업화되고 슬럼화된 거주지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잘 정돈되고 구획된 거주 공간 또한 많이 있다. 다양한 건축 및 환경 관련된 법규에 따라서 거주지 주변에 많은 공원도 생기고 있기 때문에 찾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주어진 조건에서 비교적 '풍광이 좋은' 거주지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풍광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그런 자연 환경 속에서 여유도 찾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인데, 예전엔 한 곳에 정착하면 거의 원거리 이동이 불가했고, 이동을 하더라도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척박한 거주지 조건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비록 척박하고 메마른 도심속에 살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버스를 타고 교외로 가서 얼마든지 좋은 풍광을 즐길 수 있다. 21세기의 '살 만할 곳'과 18세기의 '살 만한 곳'은 이렇게 큰 개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살고 싶은 곳'일지도 모른다. 불가피하게 그곳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그곳에 살게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내게 허용된 조건에서 최선의 '살 곳'을 선택했다면 그곳이 바로 내 조건에서 내가 선택한 바로 내가 살고 싶은 곳이니까 말이다. 다만, 더 높은 곳, 더 좋은 곳, 더 깨끗한 곳, 더 비싼 곳, 등과 같이 더 더 더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현재 누리고 있는 거주의 즐거움을 스스로 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것은 없다.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꼭 부족한 점이 발견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수백억짜리 집에 살아도 그 나름의 불편함이나 아쉬움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살 만한 곳'에 살고 있는지 판단해 보면 한숨만 나올 수도 있고, 잇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들 형편이 서로 다르니 거주 조건도 다를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서 통상적인 관점에서 타인과의 '차이'는 피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살 만한 곳'을 찾는 여정을 지속한다. 계속 집을 옮기면서 평수를 늘리고 싶어한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향상되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정말로 '내가 살 만한 곳',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규정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특히 더 자기만의 '살 만한 곳'의 규명이 필요하다. 만약 천년 만년 살수 있을 것처럼 끊임 없이 더 비싸고 더 넓고 더 편하고 더 화려한 곳을 찾아서 헤메인다면, 영원히 '정말로 내가 살 만한 곳'은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모두 알고 있듯이 욕망은 그 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때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택리지가 세상에 나온 시기인 18세기 중엽 조선시대의 인구는 약 7백만명으로 추산된다.(출처:조선の인구현상, 善生永助, 朝鮮總督府調査資料, 1927). 그리고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의 비율은 여러 통계자료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조선 초기엔 총 인구의 1% 내외, 중기까지는 5%내외, 그리고 후기에는 양반제가 유명무실화 되면서 70% 이상이었다고 한다.
택리지가 나온 시기의 인구는 위에 밝힌대로 약 7백만이고, 당시는 조선 중기이기 때문에 양반의 수는 5%내외였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면 35만명 수준이고, 이 숫자는 인구 기준이기 때문에 가구 기준으로 하면 다시 10만 가구 이하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당시 조선의 땅덩어리에서 '양반으로 이루어진 10만가구'가 살만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택리지에서 이상적인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그렇게 설명했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