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준비, 액션 그리고 반응
5. 그릇 속의 조약돌을 헤아려라 (p218 ~ p225)
한 젊은 수도자가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명상과 사색을 했다. 명상하는 동안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이 선행과 관련된 바람직한 생각인지, 아니면 증오와 탐욕과 편견에서 비롯된 해로운 생각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조약돌을 그의 앞에 잔뜩 쌓아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그릇을 하나씩 놓았다. 명상하는 동안 바람직한 생각이 떠오르면 왼쪽 그릇에, 해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오른쪽 그릇에 조약돌 하나를 넣기로 했다. 첫 날의 명상을 끝내고 그는 그릇 속의 조약돌을 헤아려 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조약돌이 해로운 생각의 그릇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젊은 수도자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이 수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했다. 며칠이 지나자, 두 그릇에 담긴 조약돌의 수가 엇비슷해졌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을 때는 바람직한 생각의 그릇에만 조약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 이야기는 불교 경전에서 인용한 것으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간단하고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억지로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까지 습관을 고칠 필요는 없다. 수도자가 생각의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 가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탐탁하지 않은 습관들을 극복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이런 판단은 '부정적인 부정성'의 표현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데. 그런데도 그런 실수를 빌미로 자신을 학대한다. 그런 불쾌한 감정에 속상해 한다. 요컨대 습관에 대한 감정적 에너지는 오히려 습관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고치고 싶은 습관을 자각하는 데 집중한다면, 그런 습관이 나타날 때마다 곧장 그 습관을 인식해 낼 수 있다. 첫 단계에서는 습관적으로 행동을 저지른 후에야 그 습관을 인식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습관적 행동을 하는 중에 그 습관을 인식할 수 있으며, 나중에는 습관적 행동이 시작될 때 그 습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습관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을 인식해서 실제로 행동하기 전에 자제할 수 있다. 끝으로는 그런 충동심까지 사라진다.
선의의 목적과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자각이 결합될 때 습관을 차근차근 고쳐 나갈 수 있다. 몸짓과 말투, 심지어 정신의 습관까지 고칠 수 있다. 예컨대 퍼팅의 습관까지도 고칠 수 있다. 부정적인 독백을 중얼대는 습관도 고칠 수 있다. 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점수를 생각하는 습관도 고칠 수 있다.
습관을 고치는 비법
고치고 싶은 습관이 있는가? 조셉 패런트가 설명한 어느 수도자가 자신의 나쁜 습관을 없애기 위하여 했던 '조약돌 헤아리기 방법'을 재해석한 비법을 통한다면 정말 가능할까? 나는 확실하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성공률이 낮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기 때문에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것이 습관인데 나쁜 행동이나 사고는 쉽게 반복되며 습관으로 고착되지만 좋은 행동이나 사고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대단히 도전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의 바닥을 아무리 철수세미로 닦아도 완전히 제거하기는 너무 어렵다. 손가락과 손목이 저리도록 냄비 바닥을 밀어대고, 손톱에 검은 구정물이 베이도록 오랜 시간 닦아내도 일부 검댕의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나쁜 습관은 이와같이 제거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조셉 패런트가 제시한 비법의 터득으로 이끌어 주는 중요한 통로는 '습관에 대한 자각'이다. 즉 고치고 싶은 습관 그 자체를 먼저 알아채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는 습관이 있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조셉 페런트가 설명했듯이 나쁜 습관에 대한 자각은 통상 '저지르고 난 후'에 후회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후회가 반복되면 향후 후회 될 상황을 맞게될 때 후회를 초래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쌓여가면서 후회할 행동을 하는 빈도가 줄어들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나쁜 습관이 없어지는 과정은 정확히 이와 같다.
여전히 '수리중' 인 나쁜 습관
나의 경우 '비판하는 습관'을 고치기 위하여 꽤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나의 비판하는 모습'을 최대한 빨리 자각하여 그런 행동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면전에서 하는 비판은 물론이고 뒤에서 하는 비판(뒷담화)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그 외에도 고쳐야 할 습관이 더 있지만, 제일 급한 것이 이런 '비판하는 습관'이라고 생각하고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너무 강하게 고착되었는지 개선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심지어 비판을 하면서도 비판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비판할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까지 한다.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내가 지금 비판을 하지만 그 비판의 내용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건 비판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기술'일 뿐이라는 논리다. 여전히 이러한 논리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내용 자체가 사실일지라도 그 내용이 비판적이라면 비판을 한 것도 명백한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내게는 '사실'일지라도 비판의 대상에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맹점도 있다.
자기 자신과 이런 끝없는 말싸움을 하면서까지 타인에 대한 부정적 '뒷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런 행동을 완전히 멈추는데는 여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차츰차츰 빈도와 강도가 줄어드는 것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사실 완벽하게 그런 습관을 제거하는 것은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빈도를 최대한 낮추는데에 집중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나의 나쁜 습관은 '수리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비판하는 습관에서 여전히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런 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비판하지도 않는다. 나 스스로 부단히 시도하고 있는 나의 노력의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정도 효과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느리지만 그래도 개선의 추세를 보이고 있는 나의 노력에 대하여 나 스스로가 실패하고 있다는 섣부른 꼬리표를 붙이는 순간 나의 노력은 정말로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흰 티셔츠에 김치 국물이 튀면 어지간해서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세탁을 꼼꼼히 하면 대부분의 얼룩은 지워진다. 어쩌면 나쁜 습관을 제거하는 것은 좋은 습관에 의해서 그것을 대체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다시 본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돌아가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김치 국물을 깨끗이 지워서 원래 순백이었던 완벽한 흰 티셔츠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나는 사용해 본 적은 아직 없지만 요즘은 '과탄산소다'라는 저렴하고 친 환경적인 표백제를 통하여 거의 완벽하게 흰 옷의 얼룩을 지울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세상이다. 언젠가는 나쁜 습관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과탄산소다같은 비법 가루약'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