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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Jul 13. 2024

삶의 가치 기준

여름 이야기 - 일곱

내가 어떤 식으로 타인에 의하여 규정되는지는 결국 내가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인이 나를 판단하고 규정한다고들 하지만 결국 나를 그렇게 판단하고 규정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를 걱정해야 한다.  












쓸모 없음의 쓸모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그냥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쁜 것, 악한 것, 더러운 것도 나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맛있게 과자를 먹고 봉투는 버린다. 봉투같은 포장재는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자를 다 먹은 이상 그 쓸모는 없어졌다. 그러나 버려지기 전까지 그 봉투에는 온전한 가치가 있었다. 먹을 수는 없지만 먹을 것을 보호해 주는 역할이 그 쓸모였고 그것이 과자 봉투의 소중한 본연의 가치이다. 


 나는 시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쓸모 없는 것의 쓸모에 대한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내용은 사실 이미 완전히 타버린 과거의 관계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솔직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는 또 타인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준 적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미 그 누군가를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쓸모 없이 버려진 다 타버려서 허옇게 변해버린 연탄재도 한 때는 소중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너무 T같은 말이지만 사실 연탄은 다 타버려도 여전히 쓸모가 있기도 하다. 연탄재는 쓰레기 매립장의 복토재로 매우 유용하며 벽돌을 제작하는 식으로 재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연탄의 쓸모는 그렇게 다 타버린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의 쓸모


 사람들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누가 어떤 가치를 갖는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쓸모가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가치가 있으려면 그에겐 내가 원하는 쓸모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곧 내 관점에서 그의 가치가 된다. 모든 인간이 존재 자체로 그 의미가 있고 그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타인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타자의 입장에서 내가 그에게 쓸모가 없다면 난 그의 관점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사람들은 남을 쉽게 판단하여 무가치하다고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부끄럽지만 사실 나도 간혹 그랬다. 


 사람들이 모든 것의 쓸모에 집중하는 것은 그것들로 부터 효용을 얻어 내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사용하며 만족을 느끼고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 그때 그 물건은 가치를 부여받게 되고 쓸모 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쓸모'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생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쓸모가 없다는 것은 그의 생존에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잡초, 쓸모없는 작대기 등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과 달리 사람은 그 가치를 너무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똑똑한 사람과 유능한 사람은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치가 없다고 단정지어서도 안된다. 심지어 한참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도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사실 어제 아주 오래간만에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고 불리워질 만한 사람을 우연히 겪었다. 흔히 '동네 바보'라고 표현하지만 바보라는 의미가 조롱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표현 보다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었는데 아파트 단지의 정원에 설치된 흔들 의자에 혼자 검은색 작은 가방을 안고 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눈매와 앉아 있는 모습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는데 내가 그 옆을 지나서 걸어갈 때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더니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빠른 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만 내게 고정한 상태로 말이다. 예전에는 꼭 동네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그동안 만나보기 어려웠는데 어제 갑자기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낮이었기에 망정이지 늦은 밤이었다면 아마 나도 기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일단 상대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어 그냥 발걸음을 재촉하여 버스 정거장으로 계속 움직였는데 그 사람은 계속해서 내 뒤에 2~3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 걸음이 꽤 빠른 편인데도 불구하고 발빠른 귀신처럼 거의 150미터는 족히 내 뒤를 그렇게 따라왔다. 뒤 돌아보고 한 소리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놀라서 소란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묵묵히 내 갈 길을 더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이 150미터 정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후에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평소 이동 범위가 그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동 범위를 넘어서자 포기한 것 같았다. 아마 다시 그 흔들 의자로 돌아가서 다음에 또 따라갈 상대를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알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더운 여름날 갑자기 속보로 걷는 통에 등줄기에는 금새 땀이 흘러 내렸다. 그 '지능이 낮은 사람'을 떨쳐 내고 다시 자유를 찾았을 때 나는 일종의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약 150미터 이상을 내내 앞만 보고 속보로 걷는 동안에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불편한 순간을 벗어 나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 '지능이 낮은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과연 어떤 쓸모가 있었을까?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내게 쓸모가 있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삶의 가치 기준이라는 재미없는 주제에 대한 글의 작은 소재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별 이상한 사람(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례를 든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고 따라서 비록 크기는 서로 다를지언정 일정 부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장자의 '쓸모 없음의 쓸모'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쓸모가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곧게 자라지 않고 단지 이리 저리 뒤틀리고 굽은 나무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 땔감으로나 써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나무의 다른 쓸모를 찾아야 한다. 뒤틀린 나무의 나무가지는 노인에겐 유용한 지팡이가 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독특한 조경수가 될 수도 있다. 기존의 관념속에 이미 형성된 '정형화된 쓸모'에만 집착하면 그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다른 형태의 '쓸모'는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어떤 것이든 쓸데 없는 것은 없다는 시각이 필요하다. 관점과 시각에 따라서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악인의 나쁜 행동을 통해서 반면교사를 배운다면 그 악인은 그런 본보기로써의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행위는 따르지 말아야 할 사례의 교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악인의 가치는 이런 식으로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러면 타인에게 어떤 가치를 가질지 궁금하다. 어쩌면 나도 반면교사의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니 뭐라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갑자기 뒷통수가 따갑게 느껴진다. 


 사람은 그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서 타인에게 인식될 것이다. 나도 사람이니 나의 가치관에 따라서 지금까지 삶을 살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가치관이 타인에 대한 나의 쓸모를 규정할 것이다. 즉 내가 어떤 식으로 타인에 의하여 규정되는지는 결국 내가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인이 나를 판단하고 규정한다고들 하지만 결국 나를 그렇게 판단하고 규정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를 걱정해야 한다.  




나의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


 아마 대한 민국 사람들 만큼 돈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물질 주의가 만연해 있는 곳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물질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참혹한 전쟁 이후 이렇게 급속한 발전을 절대로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싫어 했을리가 없다. 대한 민국 사람들은 물질 그리고 돈을 좋아했고 그래서 지금처럼 꽤 부유해 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80년대까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을 벗어나서 그저 살아 남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르지만 차츰차츰 자본의 힘과 매력에 눈을 뜬 후에는 물질과 돈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 왔고 그에 힘입어 오늘과 같은 위치에 이르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한 민국 사람들이 꾸준하고 질기게 오랜 시간 동안 물질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높은 경제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점은 물질 주의를 추종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물질 우선 주의가 최근 수 십 년간 우리 나라 전체를 이끌어온 주요한 동력 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할 뿐이다. 


 물질, 특히 돈은 삶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따라서 그 가치의 무게는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산속에 틀어 박혀서 살더라도 일정한 규모의 돈은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필품이라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구가 '물질의 소비'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로 작동되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돈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거워졌다. 


 거의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돈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돈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종교 시설에 가도 가끔은 돈을 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은 직장에 가려는 목적은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함이다. 불과 십여년 전만해도 직업 선택의 기준이 적성이라고 답하는 사람의 비율이 제일 많았다고 하는데 이젠 '보상 혹은 보수'로 답하는 사람의 비중이 제일 높아졌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적성은 무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적성을 고려하여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만 그 숫자는 갈수록 줄어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돈'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경로까지 바뀌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많은 돈을 버는 삶도 물론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돈을 버는 삶을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나 또한 돈의 가치를 매우 절감하고 있다. 오랜 세월 직장 생활을 한 이유가 바로 정기적인 급여를 받기 위해서 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일 중요한 가치의 기준을 '돈'에 두고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얼마 만큼 있어야 만족할지와 같은 만족도에 있어서는 기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돈을 더 벌기 위하여 내 삶의 또 다른 가치를 과도하게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나름대로 적당한 선에서 가치 기준을 조정한 삶을 살아왔다. 


 Input이 없으면 Output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낮다. 따라서 과도한 욕심과 기대를 갖고 나의 시간을 허비(Input)하면서 욕망(Output)의 대상을 쫓기 보다는 다른 측면의 가치를 누리면서 내 삶의 균형을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 따위이다. 이런 일들은 돈을 만들어 낼 가능성은 없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낸다. 정서적 안정과 평안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족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무형의 가치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과하면 결국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도 없게 된다. 욕망은 결코 다 채울 수가 없다. 돈도 마찬가지다. 무한대로 갖고 싶은 것이 돈이다. 결국 채우지 못할 목표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거기에만 치중하면 당장 주어진 삶 혹은 행복을 발견하지도 못하게 된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 마치 프로그램되어 있듯이 말이다. 사실 형식적인 측면에서 해석할 때 누군가에게 정립된 가치관은 그의 뇌와 가슴에 그런 가치 기준이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명령이 수행되고 그 명령 수행 도중에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변수에 대하여 기존에 규정된 규칙 혹은 대응 방식에 따라서 답을 해 가면서 결과적으로 어떤 값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한 어플리케이션에 설치된 프로그램은 결국 그 어플리케이션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사람을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격하하는 것은 아니고 실행 방식과 적용 방식의 유사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양질의 프로그램이 설치되어야 내가 원하는 산출물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좋은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좀 더 나은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가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물질 중심 혹은 돈 중심의 가치관도 필요하지만 그런 가치에만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할 것 같다. 즉 다른 가치관도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개인별로 다 다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균형이 잡힌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그래도 균형이 잡힌 가치관을 가지 사람의 비율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한다.


 직업을 선택할 때 보수 보다는 적성을 중요시했던 시절이 그렇게 오래 전이 아니다. 십여년 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한 것이다. 누가 아는가 앞으로 십년 후에 조사를 해 보면 다시 보수 보다는 적성을 찾는 사람의 비중이 높아질지. 그런 시대가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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