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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dulum.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린 반복 운동. 당신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by Eaglecs

초안 2022. 3. 15. / 2024. 04.15 정서


들어가는 글


불과 2년전에 써 놓은 글인데 지금 읽어 보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로마 제국의 정치인인 세네카가 이야기 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꼭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그 속에서 나의 기능을 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개념을 암시한다. 그 암시는 평생도록 가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구속과 이끌림을 받아들이고 그 대신 우리의 자유와 타고난 권리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 사회에서 활용되도록 허용한다.


오늘의 이야기는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도 몰랐던 우리 사회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신선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겁고 둔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독을 권한다.


혹시 아는가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듯이, 내게 주어진 권리와 더 폭 넓은 자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분명히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지 않는가? 이 기회에 그것을 찾기 위한 단서를 발견하기 바란다.




본문



바딤 젤란트의 Reality Transurfing 이라는 책을 다시 보고 있다. 3권으로 되어있는 책을 전권 1회독 하고, 다시 1권을 열었다. 내용이 그리 쉽지 않기도 하지만, 내 이해력이 높지 않아서 인지 최소한 3번 이상은 봐야 어슴푸레하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많은 내용이 있지만, 내게 깊은 공감을 준 Pendulum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하고 싶다.


'우리는 뭔가에 자신을 바치도록 훈련받아 왔다. 나라, 가정, 회사, 이념.... 이런 것들에 우리는 자신을 바쳐오고 있는데 사실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나도 늘 이렇게 느껴왔는데, 그 책에 그대로 나와서 매우 놀랐었다. 그런 ‘것들’에 우리는 '봉사' 하고 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성장하고 힘이 세져서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실현된다. 그래서 결국 건물, 설비, 단체, 기술, 그리고 가정 등과 같은 구조체가 된다. 이렇게 어떤 형태의 사념 에너지의 매개 변수가 동일해 질 때 하나의 구조체가 생긴다고 한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공조하면 부부가 되고, 많은 사람의 에너지가 공조하면 어떤 단체(회사)가 된다. 그래서 (회사를 위한)건물이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례를 보면 사념이 결국 물화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없던 것이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있던 물질이 사념의 에너지에 힘입어 하나의 객체로 물화하여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개개인의 사념 에너지가 합쳐지면 하나의 흐름이 되고, 이 흐름, 즉 에너지로 이루어진 바다의 한 가운데 정보에 기초한 독자적 에너지체가 만들어지는데 이게 펜듈럼이다. 동일 주파수로 공명한 것들이 다 같이 모인 것이 그것이다. 끼리끼리 모인 것을 Pendulum 이라고 한다고 보면 된다. 조직 폭력단도 Pendulum의 한 형태일 뿐이다. 즉, 많은 지지자가 생겨서 뭔가를 추종하게 되는데 그 추종의 대상이 바로 펜듈럼이다. 삼성 전자, 현대 자동차, 축구, 게임, 등 등 많은 에너지가 모이는 단체나 조직들이 모두 펜듈럼의 일종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대상이 바로 펜듈럼이기도 하다. 개인이 그 지지자가 되고 그래서 그 개인은 자기의 에너지를 그 팬듈럼에 아낌없이 가져다 바친다. 물론 개인은 그렇게 자신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튼 뭔가에 대한 인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이 대중의 지지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기를 받는 대상이 구체화 되어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 Fandom 도 마찬가지이다. 뭔가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Pendulum이 되고, 그 Pendulum이 개개인의 에너지를 먹고 살고, 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사념 에너지에 의해 그 특질이 형성된 모든 구조를 펜듈럼이라고 한다. 단위 펜듈럼들이 모여서 하나로 흔들리기 시작하면 집단 펜듈럼이 된다. 집단 펜듈럼은 하나의 독립적 상부구조처럼 지지자(개인)들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자기가 자진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의 법칙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다. 이게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 의지대로 회사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급여를 받는 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닌 것이다. 회사라는 펜듈럼의 법칙(사칙)대로 살고 행동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약간 받는 것뿐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끝없이 Pendulum에게 가져다 바친다. 소진될 때까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위에서 회사를 펜듈럼의 예로 들었는데, 매우 정확하고 완벽한 예라고 생각한다. 한 목적을 위하여 개개인이 모여서 회사라는 조직체를 만들고, 거기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회사라는 펜듈럼을 더 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하여 개개인의 에너지를 계속 쏟아 붇는다.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 회사라는 펜듈럼은 개개인의 에너지를 빨아 들여서 강력한 성장을 이룬다. 그런데 그 지지자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서 성장했지만 펜듈럼은 지지자 밑이 아니라 위에 군림한다. 그래서 펜듈럼은 그 본질이 파괴적이라고 한다. 펜듈럼의 파괴성은 펜듈럼이 지지자 개인의 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데에 있다. 펜듈럼의 목적은 오직 하나, 지지자 개개인(사원)으로부터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펜듈럼이 더 커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회사라는 펜듈럼의 역할이 분명하게 이해된다. 끝없이 조직과 회사의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에너지가 필요하다(에너지가 희생된다). 펜듈럼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희생 되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은 개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회사라는 펜듈럼에 봉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그 개인은 전기가 다 떨어진 베터리 마냥 버려진다. 일부 rechargable battery는 수백 번 반복 충전을 통하여 에너지를 계속 쏟아 부으면서 존재하지만, 결국 수명이 다 하면(에너지가 다 소모되면) rechargable battery도 역시 버려짐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펜듈럼이라는 시스템의 영향 하에 살려면 그 시스템의 법칙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펜듈럼 시스템(회사)은 개인에게서 최대한 에너지를 흡수 한 후에 무심히 버려 버리는 것이다. 펜듈럼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펜듈럼 속에서 사는 개인 중에서도 일부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지지자로서 펜듈럼에게 에너지를 주고(올인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바쳐 일하고), 펜듈럼은 그 대가로 그에게 살 만한 환경(급여, 승진)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지지자가 조직의 규율을 깨는(에너지를 바치지 않고, 개인을 위하여 에너지를 쓰는 등) 순간 그의 사념 에너지 주파수는 펜듈럼의 진동 주파수와 어긋나게 되고, 그래서 그 지지자의 에너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 펜듈럼은 그 뻣뻣한 지지자를 내치거나 죽인다. 회사라는 조직과 매우 유사할 정도가 아니라 완벽히 동일한 구조이다. 이렇게 개개인이 일하고 있는 회사라는 조직체는 절대로 개인의 행복과 성장 그리고 자유와 안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이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에너지의 원천인 개개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양분(보상)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개인에게서 흡수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은 그 속에서 자유를 잃고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작은 나사와 같이 강요된 규칙대로만 살아야 그 펜듈럼의 휘하에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이 펜듈럼은 지지자들의 행복에는 결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팬듈럼들은 새로운 지지자(개인)를 유혹하기 위하여 세련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불꽃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펜듈럼을 향해 날아가서 자신을 바치고 타 죽는 것이다. 펜듈럼의 선전술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라를 위한 군입대 후에 맞는 장렬한 전사?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뭐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일단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회사에서 ‘빛나는 나사’가 되는 일? 등 등? 펜듈럼은 온갖 고상한 가면 뒤에다 진정한 동기를 숨기지만 그 활동은 지지자 개인의 운명을 파멸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펜듈럼의 속성을 다시 정리하면서 회사라는 시스템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자.


1. 펜듈럼(회사)은 지지자들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 이 과정을 통하여 펜듈럼의 진폭이 점점 커진다. 정확히 맞다. 사원들의 에너지가 없이 회사는 존재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 사원들의 에너지가 충분히 오랜 기간 투입되어야 회사가 커진다. 열정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에너지 소모"가 있지 않는 한 회사의 성장은 제한적이다. 지지자들의 열정의 결과는 그들에게는 향후에 ‘별 대가 없는 빈 성과’로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에서 펜듈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2. 펜듈럼(회사)은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지지자를 가능한 한 많이 끌어들이려 한다. 맞다. 회사에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차별 보상하고 평가하여 누가 더 펜듈럼에 많은 에너지를 가져다 바쳤고 바칠 의향과 잠재력이 있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에너지를 많이 가져다 바치지 못하는 사람은 저 성과자 혹은 불필요한 자가 된다. 그리고 버려진다. 잠도 자지 않고, 휴가도 가지 않고 에너지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은 펜듈럼이 가장 좋아하는 에너지 기부자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목적을 잃고 있다. 사실 삶의 목적을 알지도 못한다. 단지 펜듈럼에 인정 받아서 약간의 꿀을 더 빨기 위하여 자신의 정수를 매우 오랜 기간 짜낸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약간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 그래서 약간의 만족을 누린다. 나도 약간은 비슷하기 때문에 잘 안다. 그리고 퇴직하여 약 10년 정도 오로지 경제적으로 약간만 더 여유가 있는 채로 살다가 미미하게 남은 자신의 에너지가 완전 소진되면 자신의 삶의 소임을 다 한 것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편안하게 혹은 일부는 고통스럽게 이 삶을 마감한다. 이렇게 자신이 rechargable battery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죽어서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99.99%는 1회용 베터리 아니면 rechargabe battery일 뿐이다. 반 영구적인 원자로 같이 에너지가 끊이지 않아서 펜듈럼에 아무리 에너지를 바쳐도 본인의 행복과 본인의 삶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는 펜듈럼의 지지자(개인, 회사원)는 없다.


3. 펜듈럼(회사)은 지지자 그룹을 다른 모든 그룹과 비교하고 대항하게 한다. 나라 대 나라, 회사 대 회사의 대항이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회사도 늘 경쟁사를 거론하면서 거길 뛰어넘어야 한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거길 뛰어넘으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펜듈럼, 즉 회사에 주입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뛰어넘기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지지자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부여된 에너지가 소진되면 폐기될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 내가 이 조직에 들어온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없이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래도 Rechargable battery에 해당되기 때문에 아직까지 폐기되지 않은 것인데, 아무튼 rechargable battery도 recharge 회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곧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 끝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펜듈럼은 경쟁사 혹은 뭔가(매년 더 높은 펜듈럼의 목표가 생긴다)를 뛰어넘을 것을 주문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의 에너지 원천이 완전히 고갈 될 때까지 뽑아낼 것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에너지를 최대한 빼앗기지 않으려고 틈만 나면 코드를 빼오긴 했지만(펜듈럼의 정체를 약간씩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뒤를 돌아보면 내 온몸에 코드(빨대)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만큼 팬듈럼은 지독하고 철저하다. 도로에서 파란 신호등이 켜진 횡단 보도를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고, 그 때마다 꼭 차를 세워야 하는 것처럼 나의 자유를 향한 발걸음은 수시로 펜듈럼의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진행을 방해받는다. 횡단 보도라는 것도 결국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이다. 따라서 펜듈럼의 작품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안전을 위한 장치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라는 펜듈럼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이라는 펜듈럼의 에너지 원천을 관리하는 Tool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한 상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질을 보면 사회라는 펜듈럼이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임엔 틀림없다. 개인의 행복과는 상관이 별로 없다. 결과적으로 개인이 약간 보호받는 느낌을 받게끔 펜듈럼에 의하여 디자인된 것이다.


4. 그리고 펜듈럼은 지지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모든 이를 공격적으로 비난하고 그들을 복속시키거나 중화시키지 못하면 모조리 제거하려고 한다. 회사의 방침, 즉 회사에 에너지를 제공하려고 하는데 소극적인 지지자들은 비난을 당한다. 성과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에 에너지를 덜 바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에너지를 많이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에 비하여 좋지 못한 보상을 받는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펜듈럼은 그 지지자가 못마땅해진다. 따라서 결국에는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펜듈럼은 자신의 행동(에너지를 빨아들이는)을 정당화하고 가능한 많은 지지자들을 복속 시키기 위하여 멋지고 매력적인 가면을 쓰고 고상한 목표로 위장하며, 사람들의 감정을 조종한다. 금년 매출 목표 몇 조원이 마치 나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게 사고를 조종하는 것이 한 예이다. 상상할 수 없는 큰 금액의 매출 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중요한 자존감"을 느끼도록 프로그램화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목표의 달성은 개개인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과거에도 목표를 달성해도 그 결과값에 대한 보상은 지지자들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99.99% 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원대하고 거창한 목표가 대단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개개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달성하면 지지자들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갈 것처럼 위장하고 속인다. 그런 방법을 통하여 지지자들은 그것을 믿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마지막 한 톨까지 짜내서 펜듈럼에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가 떨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펜듈럼에 의하여 폐기되는 것이다. 물론 일부 펜듈럼은 지지자들에게 혜택을 돌려주기도 하는데, 이런 펜듈럼은 극소수일 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신이 펜듈럼이라면 뭔가를 기꺼이 나누겠는가? 쉽지 않다.


펜듈럼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 정체를 제대로 인식하여, 거기서 당신의 에너지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고 최소한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그 게임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튼 파괴적인 펜듈럼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하여 항상 자기와 유사한 에너지체와 경쟁한다. 경쟁사가 바로 그들이다.


심지어 자선 단체도 펜듈럼이다. 그들은 자선을 베풀라고 하면서도 정작 나나 당신의 행복에는 무관심하다. 정말 진심으로 자선을 한다면 좋다. 당신이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게 당신의 펜듈럼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할 것이다. 단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난 이제까지 약 25년 정도 동안 2곳에 일종의 기부를 해 왔다. 큰돈은 당연히 아니다. 분기별로 12만원 정도이다. 6만원은 양로원, 6만원은 어린이 재단으로 보낸다. 돈을 보내면 자잘한 치약, 커피 등을 답례로 보내 주기도 한다. 이 돈은 절대로 큰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때 진정한 기부의 마음으로 한 적은 별로 없다. 부탁을 거절하기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다. 그래서 계속하여 청구서를 받을 때 마다 퇴직할 때까지만 하고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사랑하는 마음, 노인과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거절하기 어려운 마음이 매우 더 컸다. 그러나 사실 그 두 단체가 지난 25년동안 내 행복을 위하여 한 것은 없다. 물론 인사치레의 덕담은 있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난 자선적인 모습을 거의 자선이라고 하기 어려운 금액을 지출하면서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선 단체 또한 하나의 펜듈럼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바딤 젤란트가 제시한 Pendulum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너무 깊은 공감이 된다. 그래서 3권을 순식간에 읽었다. 짧은 독서로는 얻을 수 있는 영감의 여운 또한 매우 짧기 때문에 이젠 밑줄을 그어가면서 다시 2회독을 시작했다. 3권을 3회 제대로 숙독하였을 때 내 삶이 더 의미 있고 자유로워졌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에너지원에 대한 방어력은 일 단계 올라가지 않을까 한다.


펜듈럼에게 그간 엄청난 에너지의 흡수를 당했기 때문에 절절히 바딤 젤란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펜듈럼과의 싸움에서 이젠 좀 더 현명히 대처할 필요가 있고, 그 단초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기쁘다. 다음에 어떤 생각으로 다시 글을 쓸지 모르지만, 적어도 단순한 Rechargable Battery 수준의 개인으로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글을 정서하는 2024년 4월 현재 Rechargeable battery였던 나도 결국 펜듈럼에 의하여 폐기 되었다. 에너지를 아끼다가 걸린 것이다. 그 펜듈럼의 힘에 따라서 반복운동을 하면서 나의 에너지를 제공했어야 하는데 그걸 서서히 줄여 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별로 줄이지도 않고 아주 미세 조정했을 뿐인데 귀신같이 알아챘다)





나가는 글.


들어가는 글에서 등골이 오싹해지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고 했었다. 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그래도 이 짧은 글 보다는 바딤 젤란트의 책을 봐야 좀 더 강도가 센 이해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편린만 보여 줄 수밖에 없는 나의 글을 통해서는 옅은 이해와 충격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 그리고 조직이 기능하는 모습'에 대한 이해가 넓어 졌을 것으로 기대한다. 난 이 글에서 펜듈럼을 범죄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두려움에 휩싸인 감정에서 써내려간 듯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이 글의 목적은 나나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더 해보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주체적으로 살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닌 경우가 거의 대 부분일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는 이 글을 읽었다면 '이 글에서 제시하는 관점 기준에서' 약간은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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