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 하면 그냥 도시에 살아라. 계속 거기에서 살아왔었다면 말이다.
2024. 04. 15
들어가는 글
꽤 오랜 시간동안 전원 주택에 살고 싶었다. 수도 없이 검색하고 관련된 사진을 보면서 부러워했었다. 전원 주택의 정원 벤치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상상은 적어도 수십번은 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런 마음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약간 기준이 틀리다. 아내를 위하여 도시에 근거지를 일단 두고 싶다. 그리고 필요할 경우 단기로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계획 중이다.
아직 한창(?) 나이인데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는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겁이 많다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신중하고 철저한 준비성의 한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젊은 청춘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퇴직을 한 장년층 이상에게는 약한 모습이 필요하다. 즉, 신중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젊었을 때도 겸손이 미덕이지만 나이가 들면 더더욱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겸손은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내가 전원 주택의 마련과 관련하여 나의 현실을 겸손하게 인식하는데 10년 이상이 걸린 것 같다. 오늘의 주제는 너무 뜬금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오늘의 주제에도 당신이 몰랐던 의미가 있다. 맨 뒤에서 확실하게 알게 된다. 계속 읽어 달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본문
30대 후반부터 주택에서의 삶을 막연하게 동경했었다. 20대 후반까지는 실제로 주택에서 거주하기도 했기 때문에 주택에 대한 많은 기억이 있다.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아무래도 편리하긴 하지만 작더라도 정원이 있고 마당이 있는 집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기억을 완전히 잊기가 어려울 것이고 나도 그랬다.
그러나 도시에 있는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현실, 아이의 교육 문제, 그리고 벌레를 싫어하는 아내, 등 많이 고려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 로망은 말 그대로 소설 속에서만 존재가 가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고 없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이 인간 심리인지라 내게 없지만 살 상황은 되지 못하는 바로 그 대상인 전원 주택은 저 멀리 떨어진 호수 속에 비친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내가 닿을 수도 가질 수도 없지만 계속 가지고 싶은 존재였다.
전원 주택에 대한 로망은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하루에 서너 번은 전원 주택 혹은 시골 주택 관련된 블로그나 카페에 들락거리면서 매물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악수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린 TV 속의 멋진 연예인을 보고 만족감을 느낀다. 그와 같이 전원 주택은 내게 있어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너무 갖고 싶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나랑은 다른 세상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인정하고 있는 그런 대상말이다.
내가 오늘 전원 주택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것은 상당수의 남성이 나와 비슷한 꿈을 꿨고 여전히 꾸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이미 이루고 잘 적응하면서 행복한 삶을 꾸리는 사람에겐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었지만 꿈은 꿈일 뿐, 전원 속에서의 삶이 맞지 않아서 찬란했던 꿈을 폐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분들께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동시에 축하와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것을 실현했지만 막상 해 보니 아니라는 판단이 설 때 그걸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또하나의 매우 용기있는 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판단 착오를 인정하고 다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하여 전원주택에서 원점으로 회귀한 것은 대단히 현명한 결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식 용어로 ‘손 절’을 제대로 한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손 절은 고수나 하는 것이다. 하수는 그것을 못해서 늘 물리고 그 후 손실의 폭을 더 키우곤 하지 않는가?
오늘 나는 전원 주택의 구매를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분들과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예전엔 은퇴하면 바로 뭐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었는데, 이미 4~5년 전부터 나의 생각이 좀 방향을 틀기 시작했고 2024년 현재는 완전히 방향이 바뀐 상태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여러분들과 다를 수도 있지만, 여러 판단 기준의 하나로 참고는 할 만하지 않을까?
나는 왜 전원 주택을 갖고 싶었나?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분위기에 편승한 것 같다. 우리 솔직해지자. 나랑 비슷한 생각으로 막연히 동경한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일단 난 막연한 동경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 첫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경험이 있겠지만 전원 주택 관련된 여러 잡지를 보면 너무 좋은 집들이 많고 하나같이 멋져 보인다.
온갖 공구로 가득한 아담한 창고가 있는 집, 단정한 정원, 넓은 방, 시원한 층고, 2층으로 올라가는 밝은 톤의 목재 계단, 그리고 도시와 다른 새파란 하늘. 어느것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게 잡지 속의 사진인데 향후 내가 주택을 산다면 이럴 것이라는 망상을 한 것이다. 꽤 오랜 기간동안 말이다.
물론 살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도시에서 쌓은 나의 자산 중 상당 부분을 투입해야만 한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고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결국 전원 주택 잡지에 나온 멋진 집들은 내게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Fandom에 빠진 열광적인 팬들처럼 나도 그 멋진 사진에 현혹되어 상상의 나래는 편 것이다. 진작에 깼어야 할 꿈을 근 10년은 꾼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몇 년 전에 완전히 그 꿈에서 깨어났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본성과 전원 주택이 정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문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부지런하고 무던한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피곤해서 주말에 퍼져 있지만 나중에 퇴직을 하면 시간이 많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상황이 좋아질 것이고 따라서 부지런히 주택 관리를 하면서 전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리고 특히 퇴직을 하면서 내 가용 시간은 증가했지만 나의 체력은 감소해 갔다. 10년전의 당신과 비교하여 지금의 당신은 단지 시간이 많아진 그리고 소득이 끊긴 체력 저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엄청난 노력을 해서 건강을 유지해온 사람일지라도 10년전과 비교하면 체력이 좋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을 것이다. 체력의 현상 유지는 소득의 현상 유지보다 더 어렵다. 돈은 벌릴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체력은 그렇게 쉽게 '벌리지' 않는다.
그러면 건강 유지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별로 노력을 하지 않지만’ 전원 주택은 갖고 싶은 50~60대의 남성이 10년전의 체력과 비교하여 현재의 체력이 좋을 가능성은 아무리 후하게 줘도 1%가 안 될 것 같다. 거의 대부분 에너지가 많이 고갈되어 그냥 시간이 많은 나이든 사람일 뿐이다.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욕심부리지 않고 하면 된다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소한 공구를 다루는 것조차 적지 않은 근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은퇴자는 시력도 별로 좋지 않다. 특히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봤던 나같은 사람은 몸의 근력이 떨어진 것과 유사한 비율로 눈 속의 근육도 탄성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려면 조리개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충분히 강하고 탄성이 유지되는 안근이 있어야 한다. 수십년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상만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일한 White color들은 안근의 사용 빈도가 낮고 따라서 조리개를 제대로 움직이기가 어렵다. 즉,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한다. 그게 시력저하인 것인데 시력 저하에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 것은 안근의 탄력적 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가 그래도 먹어 줄만 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게으른’ 사람도 자기 딴에는 이정도면 부지런하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당신은 전원 주택을 가꾸고 유지할 만큼 부지런할 가능성 보다는 게으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심지어 근력이 떨어져서 ‘힘까지 부족한 눈나쁘고 소득이 끊긴 게으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너무 가혹한 표현이라면 미안하다. 하지만 나를 생각하면서 묘사한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라. 이런 사람의 전원 생활이 편하고 안락할 가능성 역시 높지 않다.
이 외에도 많은 질문을 스스로 던졌었다. 내 은퇴 자금의 일부인데 전세를 살면서 자금을 여기에 묶어둘 만한 여유가 될까? 나중에 이사 나올 때 어렵지 않을까? 아내는 벌레를 정말 싫어하는데 내가 그 불편을 없애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사실 나도 벌레를 싫어하는데 정말 주택에 살 수 있을까? 구매든 전세든 만약 내가 들어가서 살다가 적응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집 앞까지 도로가 있긴 하지만 군데군데 비포장도 있던데 날이 궂으면 길이 엉망이 될 텐데 내 세단이 거기에서 사용하기에 무리가 되지 않을까? 참, 배달 서비스도 어렵지 않을까?
전원 주택에서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위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대답은 모호하거나 불확실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젠 방향을 완전히 틀어서 전원 주택의 구매는 아예 나의 선택 옵션에서 빠졌고, 전세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 굳이 한다면 단기 경험을 위하여 몇 개월 임대로 살아보는 정도만 생각 중이다. 대부분의 은퇴자 혹은 은퇴 임박자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문득 생각이 떠오른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사람(특히 남성)은 전원 주택을 꿈꾸는 것일까? 위에 ‘분위기에 편승해서’라고 말을 했지만, 이건 전원 주택을 계속 고민하게 된 표면적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난 그것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개인이 소외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장년 혹은 노년층 남자에게는 특히 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동체에서 보이지 않는 막으로 격리되고 따라서 그 외로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연에라도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도 줄어든다. 슬픈 이야기지만 50대가 넘어서면 좀 이른 경우 이미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생긴다. 60에서 70대라면 지상을 이탈하는 지인들의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한다. 100세 시대라고? 주변에 100세 드신분 아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시라.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전원 주택에 대한 환상 만큼 큰 환상이 100세 시대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아무튼, 정말 친한 친구가 있을 경우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남이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정도 물론 존재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당신의 외로움과 격리 상태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 홀로됨에서 베어나오는 고독을 치유해 주기엔 역부족일 가능성도 꽤 높다.
특히 30년 내외의 긴 시간 동안에 ‘남자 혹은 가장’은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다양한 요구를 받아 왔고 그걸 수용하고 달성하기 위하여 끝없이 투쟁하는 삶을 살아왔다. 물론 본인 살고자 한 것이긴 한데 통상 은퇴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해 주곤 하며, 실제로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수 십년의 시간 동안 그는 끊임없는 Giver의 역할만 해 왔다. 은퇴 후에는 이제 줄 것도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끝없는 요구 사항들이 답지한다. 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 이미 성인이 된 자녀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 그리고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서 지금까지 통과해온 사회 생활에서 만들어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끊임없는 정신적 물질적 참여 등이다. 내 상황도 비슷하다.
너무 슬픈 이야기이지만, 이 세상에서 내게,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장’에게 아무것도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것은 자연 밖에 없다. 슬프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기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이 내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 큰 Merit가 아닐까? 억측인가? 그러면 좀 어떤가. 딱 하나 남은 우리 ‘가장’의 우군이다. 억측을 좀 해도 이해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연은 전원 주택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접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외롭게 소외된 노년의 남녀 가장에겐 의무와 속박에서 탈출할 새로운 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전원 주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열거한 다양한 이유로 난 내 기준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각자 사정도 다르고, 나와 달리 정말 부지런하고 여력이 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게 잘 선택하면 그만이다. 어디까지나 이 글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오늘 글을 준비했다.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자연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연 속에 위치하거나 자연과 가까운 전원 주택에 거주할 경우 자연은 간접적으로 당신의 부지런함과 불편 정도는 원한다. 완전 공짜는 아니다.
끝
나가는 글.
전원 주택을 소유하는 꿈을 꾸는가. 그건 당신의 자유이다. 나는 최근 꿈을 깼다. 꿈은 계속 꾸기 때문에 꿈이다. 한 번 깨어나면 '꿈을 깼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꿈을 꾸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을 고려하여 난 좀 더 보수적이고 겸손한 방식으로 자연을 접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다시 그런 꿈을 꿀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면 오늘 나의 이야기 속에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발견했기를 바란다. 서두에 오늘 글의 주제, 즉 '은퇴자의 꿈, 전원 주택' 에는 당신도 모르는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했었다. 여기까지 읽고서 그 의미를 찾았는가? 못 찾았다면 그 중간에 붉은색으로 표기한 내용을 다시 살펴봐라. 남자든 여자든 왜 나이가 들어서 전원 주택을 찾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 내용이다.
인간들(가족 포함)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공감을 얻거나 구할 수 없고, 기껏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외로움과 고독뿐이라서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연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찾아 봐라. 당신의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이게 막 은퇴한 당신의 부친 혹은 모친일 수도 있다. 그들의 외로움과 고독에 공감해 주고 그들이 그간 애쓴 점에 대하여 작게나마 감사하다는 카톡이라도 보내라. 이게 내가 이 글속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이다.
(출처 :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