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초안 2021.09월 / 2023. 10월 보완 / 2024년 4월 추가 보완 및 정서
들어가는 글.
오늘은 정말 재미없는 '긴' 글이다. 미리 말한다. 대부분 관심이 없을 나의 인생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냥 평범한 가장의 인생에 대하여 무심하게 구경하는 시간밖에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경험을 반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뭔지 모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인생이라면 혹시 나의 글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 인생이 남의 위로가 될 만큼 비참하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말라. 다만, 수십년간의 인생을 겪어 오면서 힘든 일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몇 번의 순간 만큼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특별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나의 삶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당신 삶을 되 비추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내용까지 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냥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남 이야기처럼 나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서 거침없이 썼다. 읽어 보니 한심한 내용도 있었고 부끄러운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굳이 내가 굳게 감춰야만 할 일을 한 것은 딱히 없기도 하다. 감춰야만 할 자극적 소재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평범한 삶의 카테고리에 들지는 못할 것 같다.
다양한 색깔을 뽐내며 화려하고 특색있는 삶을 사는 인생도 꽤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두드러진 특징과 모습을 띈다. 극속의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에 반하여 지극히 평범한 나의 인생은 그림의 바탕화면 같은 느낌일 것이다. 특색 없고 건조하지만 그래도 없으면 이상한 존재 말이다. 그림에 바탕이 없으면 그 그림은 그림의 성질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지 모를 그 바탕도 필요한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한 걸작을 존재하게 해 주는 바탕 같은 역할을 한다. 없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중요한 역할이다. 보통 사람임을,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아낸 평균적인 사람임을 감사해하고 만족해해도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보통의 삶도 특별하다. 없으면 안되니 말이다. 여기서 장자의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겠지? 부디 여러분께 나의 쓸모 없음이 쓸모있기는 바란다.
본문
어려서의 기억은 별로 없으니 대학 졸업 전후 그리고 취업 이후의 이야기부터 쓰려고 한다.
나는1995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1987년에 인하대학교 불어 불문과에 입학하였고, 1989년 11월 1일에 공군에 입대하여 30개월을 오산 공군 기지 (TACC, Tactical Air Control Center)에서 관제병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1992년 4월에 3개월은 전방 근무에 대한 단축, 추가 3개월은 특명을 받고 총 30개월 만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다음 해 봄에 복학할 때까지 철저히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냥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내 딸도 노는 것을 좋아한다. 확실히 내 딸이 맞는 것 같다.
1993년 3월에 3학년으로 복학할 때까지 거의 1년을 그냥 놀았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이가 25살이나 되었고 군대도 다녀왔으면서도 당시 난 철이 너무 없었다. 7남매의 막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철이 없었던 것이 맞다. 만약 내 아들이 그랬다면 속이 터졌을 것 같다. 내 아버지는 그러나 거의 내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실 93년 여름에 뇌부종으로 쓰러지셨기 때문에 내게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쓰러지시기 전인 92년에 제대를 했으니 내가 빈둥거리는 모습을 직접 경험을 하시기는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게 말하면 신뢰, 안 좋게 말하면 무관심으로 내게 기억에 남을 만한 압력을 주시지는 않았다.
물론 군 입대 후에 약간의 정신이 들어서 제대 및 졸업 후의 취업을 위하여 영어 공부를 비교적 열심히 했다. 삼성 마이마이 카셋트에 테이프를 넣고 AFKN 뉴스를 녹음하여 Dictation을 하면서 listening을 공부하였다. 그냥 무식하게 한 것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런 공부에 대한 조언을 해 줄 사람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것이 그런 원시적 dictation이었다. 추가로 어휘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어라고 무식하게 외웠다. 지금처럼 Internet이 있던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 줄 사람도 없었으니 그냥 무작정 내 생각대로 한 것이다.
1993년에 복학하여 1995년 2월 졸업할 때까지 취업을 위한 학점을 따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했다. 이때는 좀 더 철이 들었다. 다만 그렇게 많이 현명하지는 못했고, 아주 처절한 노력을 한 것도 아닌 듯하다. 단순히 취업을 해야 하니 까먹은 학점을 따야 했고, 무엇보다도 영어를 공부해야 했다. 맹목적으로 이 두 가지만 했다. 그러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정이 거의 다였다. 하루에 1천 원을 받아서 차비로 400원을 쓰고 나머지로 점심 때 라면을 먹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물론 간혹 밖에서 밥을 사 먹기도 했지만, 자주는 못했다. 해봐야 김치라면 300원에 공기 밥 추가. 그 시절 자주 다니던 라면 가게 아저씨의 깡마른 얼굴이 떠오른다. 당시의 나도 깡 말랐었다. 그때는 그냥 체질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못먹어서 말랐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와중에 1993년 여름 즈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뇌경색. 1년을 투병하시다가 이듬해 여름에 돌아가셨다. 그 1년간 내가 느낀 것은 처음엔 슬픔과 당혹감이 컸지만 나중엔 차라리 군대가 편했다 라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그만큼 여전히 현명하지 못하고 철도 덜 들었고 삶의 처절함도 충분히 몰랐던 내게는 큰 고통이고 고비였다. 25세의 철없는 막내 아들은 아버지의 고통과 어머니의 더 쓰린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12개월 간의 어려운 시기를 그야말로 꾸역꾸역 지냈다.
뇌경색으로 걷지 못하시니 내가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팔짱을 끼고 방을 몇 바퀴 빙빙 도는 정도로 운동을 시켜 드렸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의자에 구멍을 뚫고 그 밑에 변을 받을 수 있도록 대야를 달아서 아버지가 배변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다. 더운 여름날 아버지가 여윈 모습으로 파자마만 입고 그 변기용 의자에 앉아 계신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끊었던 담배를 한 대 피우시기도 했다. 물론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이내 내려 놓으셨지만 말이다. 몸이 아프니 담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담배는 88디럭스였다.
내게 대학 생활의 후반이 그렇게 힘들게 채워졌다.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제주였는데, 돈이 없었으니 못 갔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아버지 병수발과 병원비 지출로 형편이 어려웠고 심적인 여유는 더 없으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이 여전히 없는 나는 수학 여행에 대하여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지만, 비싸니 가지 말라고 답이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사실 여행이 가고 싶었기 때문에 화가 나고 아쉬움이 크고 그래야 하는데 난 그냥 무덤덤하게 별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냥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 대한 아쉬움만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노가다라도 하던가 방법을 찾았어야 했지만 난 그때에도 그리 활동적이거나 능동적이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냥 포기하면 바로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아무 생각 없이 수업 빼먹고, 술 먹고, 당구 치던 1, 2학년 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은 취업을 위한 공부, 편찮으신 아버지를 돕기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 던 날이 기억난다. 나름 부친의 수발을 꽤 오랜 기간동안 들었기 때문에 밤에 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늘 피곤했고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오전에 내 방에서 깜빡 잠이 들어 쉬고 있었다. 편찮으시고 나서는 계속 다리를 주물러야 했고(물론, 어머니가 주로 하셨지만 나도 밤낮 교대로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대셨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다. 집안일도 거들어야 했고(기저귀 세탁은 어머니가 주로 담당하셨고, 난 부축하여 걸음을 도와 드리거나 몸을 뒤집거나 하는 힘이 들어가는 일, 옷 입혀 드리기, 취사 활동 등을 했었다), 취업을 위한 공부도 동시에 해야 했다. 특히 1학년 때 방황(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철이 없었던 것임)하여 1년을 그냥 까먹었기 때문에 상당히 뒤떨어진 학점을 따기 위해서는 정말 공부가 필요했다. 그 시기에 1년을 편찮으신 아버님 곁에서 얼마간의 시중을 들어야 했기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이에 비해 철도 들지 못했으니. 심지어 군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힘이 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그날 오전에도 밤새 지친 난 내 방에서 잠시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내 이름을 갑자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임종하신 것이다. 고통은 없으셨던 것 같다. 철도 없고 생각도 짧았던 나는 슬펐지만 그보다는 그냥 멍하고 무덤덤했다. 지쳐 있었다. 지쳐서 몸과 마음이 어떤 한계를 약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슬픔이 그러한 나를 압도하며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금의 나이든 내 모습과 매우 흡사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들렸고, 미미하게 지금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머니도 너무 힘이 들으셨는지 울음 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그냥 구슬프게 보통의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셨었다. 이미 임종을 예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큰 놀라움과 당황함은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야 큰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베어 있는 울음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셨다.
이렇게 삶을 살아내던 가장들은 세상을 떠난다. 삶에 지치고, 그렇게 지쳐서 회사에서 퇴직을 하거나 당한 후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무엇인가에 연이어 짓눌려서 얼마간을 살다가 삶을 마감하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번의 삶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정작 자신도 그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다. 시간을 옥수수 껍데기 벗기듯이 하나하나 벗겨가면서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그렇게 아버지는 종점에 닿았었다. 남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아버지의 임종 1년 전으로 돌아가자. 내 기억에 난 군대에서 제대를 하자 마자 토익 시험을 봤었다. 결과는 750점 내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안이 비교적 여유로워서 해외 유학도 다녀왔고, 학창 시절 내내 영어 학원에 다녔던 친구가 같이 시험을 봐서 누가 잘 보는지 겨루어 보자고 했었다. 장난기가 많고 밝은 친구였다. 평소에 가방도 가지고 다니지 않고 대신 서류철 같이 얇은 것만 들고 다니는 그 친구의 성적이 높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수년간 학원을 다녔는데 나보다는 잘 보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친구는 600점이었고 내가 750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식하게 공부한 것이 약간의 효과는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학에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다. 실제로 전공 수업을 받을 때도 내가 불어를 읽으면 까다롭던 교수님이 잘 읽었다고 칭찬을 자주 해 주셨었다. 발음도 중요하지만 특히 글을 읽을 때는 적당한 문맥에서 끊어 읽어야 하는데 그걸 매우 잘했었다. 요즘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일어나게 해서 글을 읽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3년 11월에 840점을 받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당시 취업을 위하여 필요한 영어 점수를 충분히 획득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인 당시엔 지금과 같은 토익 점수의 Inflation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800점대가 드문 시기였었다. 1993년 그 시기면 한참 아버지가 아프실 때이다. 그 와중에 난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철이 든 것일까 아니면 자기만 생각하는 냉정하고 미련한 아들이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냥 당시 내가 해야 할 것, 내게 필요한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공부는 했다. 필요했으니까.
취업을 위한 영어 성적은 충분히 획득했기 때문에 난 대학교 4학년 때는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다. 사회에서 쓰기가 쉽지 않은 불어였지만, 그 언어를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전을 좋아하여 대학 4학년때 사서삼경을 읽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 그리고 추가로, 초서, 채근담 등과 같은 고전을 많이 읽었다. 남들 취업 준비할 때 난 고전과 전공 공부에 몰두했었다. 그렇게 대학교 4학년 생활을 보냈다. 당시 읽은 고전 중에서 특히 대학과 중용 그리고 채근담은 이후에도 계속 다시 보곤 했다. 중요 문장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지만, 아마도 내 삶과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이 대학과 중용 그리고 채근담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5년 1월 11일에 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졸업을 약 1개월 앞둔 시기였다. (이 회사는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었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24년 4월에 총 29년 3개월 간의 재직 후에 퇴직하였다)
IMF 경제 위기가 오기 바로 몇 해 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취업 환경이 좋았다. 내가 공부했던 인하 대학교는 당시 중견 기업 정도는 취업하기에 모자라지 않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집이 인천이었던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왜 서울까지 차비 내고 다니냐….’는 어머니 말씀대로 인하대로 진학했었다. 학과는 불어 불문과. 영문과를 진학하려고 했는데 당시 고3 담임 선생님이 영문과는 점수가 약간 부족하여 붙을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 때 그렇게 영어만 하고 뭘 더 하는가, 영어는 기본이니 다른 언어를 하나 더 하는 것이 나중에 유리하다 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건 좀 일리가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인데 만약에 떨어지면 재수를 해야 하는데, 그러느니 완전 합격선에 지원하여 발 뻗고 자는 것이 좋다’ 라는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듣고 불어 불문학과에 진학했다. 조언을 하는 선생님이나 그걸 듣고 따르는 학생이나 철도 없고 생각도 정말 짧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조언과 수용이었다. 그래서 일어일문과를 간다고 하니, 일어 배우려고 대학까지 가는 것 아니다. 일어는 자습으로도 배울 수 있다고 만류하셨다. 이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어는 관심이 거의 없어서 선택지가 아니었다. 독어는 재미도 없었고 효용은 더 낮았었다. 그래서 남은 것이 불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발을 쭉 뻗고 잤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점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붙을 것으로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합격을 하고 내가 누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재미있다. “정말 너 대학 붙었니?”라고 이야기를 했다. 7형제 중에서 유일한 대학생이 나온 것이다. 내 친구도 나중에 내게 어떻게 그 환경에서 대학을 갈 생각을 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공부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분위기의 집에서 어떻게 내가 공부를 할 수가 있냐는 물음이다. 굳이 답을 하자면, 공부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지 않으면 좀 더 좋지 않은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합격하면 최소한 대학 공부는 시켜는 주시겠다고 했고. 그래서 간 것이다. 학문을 위해서도 취직을 위해서도 아니라 그냥 그 상황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선택을 한 것이다. 지금의 내 시선에서 볼 때 딱 한 문장이 떠오른다. ‘당시의 내 생각의 수준은 정말 한심했다’.
아무튼 당시만 해도 불어가 지금처럼 위상이 미미하지는 않았었다. 쓰임새도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고등학교 때 문과와 이과를 정할 때도 정말 아무렇게나 정했던 것 같다. 난 이과를 선택했고, 집에 와서 이과를 선택했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당시 술에 약간 취해 계셨던 아버지가 이과를 가서 뭐할거냐고 하시면서 문과를 선택하라고 소리를 치셨었다. 언제나 내게 친절하고 다정했던 아버지가 역정을 내는 모습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렇게 이유도 모르고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아버지는 이과와 문과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셨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고 1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역정을 듣고 문과로 그냥 바꿨다. 제대한 후에도 철이 없었는데 고 1때는 오죽 철이 없고 생각이 모자랐을까.
요즘 아이들은 풍부한 정보를 활용하여 더 합리적이고 똑똑한 선택을 하는데, 예전엔 정보도 부재하였고 집안 분위기도 그리 민주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장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 미래는 그렇게 정해졌던 것이다. 아버지의 술김에 이과에서 문과로, 선생님의 어처구니 없는 진학지도로 불문과를 선택하면서 내 인생의 경로가 정해진 것이다.
그렇게 진로가 정해지고, 대학과 학과가 정해졌다. 누구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환경이 그러했다는 것이고 그 환경을 벗어날 만큼 나는 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4학년 때에 취업을 위하여 여러 곳에 (대학 수준과 학점 수준에 맞게) 원서를 넣었다. 당시 문과대는 전공을 살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사무직, 보험, 영업직 등에 취업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점이 낮아서 중견 기업의 일반 사무식 취업이 어려운 친구들은 보험과 영업직을 구했다. 보험회사에 취업한 동기들이 있었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취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의 학점은 나보다 높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어 성적 또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규모 인원을 채용하는 영어 성적이 그리 필요 없는 회사에 취업을 한 것이다.
27년여가 지난 지금 그들이 나보다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잘 산다. 단순히 급여가 높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의 선택이 최소한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나았다. 물론 운도 좋았었고. 사실 대학 다닐 때도 그런 친구들이 사회성이 높았었다. 그리고 활동적이었다. 단순히 학점이나 영어 성적으로 뭔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채용을 위한 그리고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수 많은 요소 중의 한두 가지에 불과 한 것이 학점과 영어 성적이다. 그것 말고도 다른 많은 수단을 통하여 나아질 수 있고 더 좋은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들도 그들의 미래를 자세히 예측하고 선택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학점이 나쁘지 않았고, 영어 성적이 꽤 높았던 나는 보험이나 영업이 아닌 일반 사무직을 선택했다. 물론 보험회사에도 지원했었는데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첫 면접이라서 매우 떨었다. 그리고 다국적 제약회사에도 지원했는데 역시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관에게 불손하게 굴었고, 대기실에서도 실수를 했었다. 압박 면접을 견디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철도 없었고 생각도 짧았던 나였다. 중견 식품 기업에는 최종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냥 작은 회사 같았기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왠지 식당에 취업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중견 기업인 또 하나의 제조회사에도 최종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회사가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공장 같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두회사 모두 지금은 엄청나게 견실한 좋은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남 산업이었다. 이곳이 정말 다른 어떤 회사들 보다도 더 제대로 된 ‘공장’ 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나름 TV를 만드는 곳으로 알고 있어서 그냥 큰 회사로 생각했었다.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과거에 아남TV가 꽤 유명했었다. 실제로 회사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내가 입사한 회사가 세계1위 반도체 OSAT(반도체 후공정 업체)라는 것도 모르고 TV 만드는 회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입사한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한심한 상황인데, 당시엔 정보의 부재로 인하여 검색을 할 수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었기 때문에 단순히 회사의 규모, 위치 등을 보고 선택하여 지원하는 식이 일반적이었다. 아마 더 똑똑한 친구들은 세밀한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직업 혹은 직장을 구했을 것이다. 난 세밀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회사에서는 내 영어 성적을 보고 채용을 한 것 같다. 당시 이 회사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해외 고객이 주이다 보니 영어 능력이 채용의 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OSAT업계에서 세계 1위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었다. 그 후 몇 년 지나고 나서는 대만계 회사에 1위를 내 주었고, 그 후 현재까지 계속 2위를 지키고 있다. 아무튼 난 TV를 만드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반도체 패키징 회사였던 아남 산업에 입사를 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공장이 서울 성수동, 부천 그리고 인천 부평(정확히는 효성동)에 있었는데, 여전히 철이 없던 나는 다들 가고 싶어 하는 서울을 제쳐 두고 집과 가까운 부평으로 배속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성적만으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이 맞고, 일반적으로 다들 서울로 가려고 하고 지방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데 알아서 부평으로 가겠다고 하니 당연히 난 부평으로 배속되었다. 이렇게 철없던 나의 첫 직장, 첫 출근 장소가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 516-1번지가 된 것이다.
그 직장에서 1995년 1월 11일부터 2021년 8월 31일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전술 했듯이 24년 4월에 퇴직했다) 물론 2018년 1월부터는 송도에서 주로 근무하지만, 아직도 한 달에 3번 정도는 부평 사업장으로 출근한다. 무려 26년 하고도 8개월 동안,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이 그냥 밀려서 취업한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있는 것이며, 어느덧 은퇴를 생각하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26년 8개월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출근하고 퇴근 한 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냥 회사일만 죽어라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진급을 해서 대리, 과장, 파트장, 부장, 팀장 그리고 2019년 12월에 직원이 200명인 고객 만족 부문장까지 올라간 것이다. 지금은 2021년 8월. 부문장으로 승진한지 약 20개월이 경과하였다. 회사 방침과 나의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부문장으로 승진을 했지만 이사 진급은 하지 못하고 있다. 나랑 같이 사원으로써 진급할 수 있는 최종 등급까지 승진한 엔지니어 출신들은 일부 이사 진급을 이미 재작년에 했다. 물론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2019년 7월에 사원의 최고 등급이 되어 2019년 12월 부문장으로 올라가서 당연히 이사 진급이 될 줄 알았는데 나는 그렇게 누락이 되었다. 그래서 2020년에는 될 줄 알았는데 또 누락이 되었다. 이젠 2021년이다. 4개월이 지나면 또 12월이다. 이때 또 누락이 되면 이젠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다시 보고 있는 2023년 10월. 이미 2번 더 떨어졌고, 금년 12월 중역인사에서도 누락이 거의 확정적이다. 5번 연속 떨어진 부문장은 역사에 없다 – 결국 5번 연속 떨어지고 예상대로 24년 4월에 퇴직을 하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론 회사에서는 계속 근무하면서 역량을 발휘하여 주길 기대한다. 직접적으로 나가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가서도 딱히 뭘 할 것(직업상)은 분명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찾을 마음도 없기 때문에 나 스스로 이 회사의 문을 열고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12월에 또 누락이 되면 과연 여기에서 계속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앞서 말했듯이 의문은 얼마전에 해소 되었다)
12월이 되면 거의 27년을 채운다. 1월 11일에 입사를 했으니 26년하고 11개월 20일을 채우는 것이 되며 따라서 거의 27년이다. 충분하다. 내가 여기에 남아 있는 것, 매일 아침 그냥 관성에 이끌려서 아파트 지하 2층으로 내려가서 내 차를 50분간 몰고 이곳 송도로 오는 것은 왜 일까?
첫째, 딱히 다른 계획이 없다.
둘째, 아직 나가라고 않는다.
셋째, 딸아이가 아직 유학 중이기 때문에 2년 반 동안 지원해 줘야 한다.
넷째, 생각이 안 난다. 회사를 위해서, 훌륭한 후배를 잘 키워서 내 후임으로 만들어 놓고 나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아서 등, 은 아니다.
무엇보다 실제로 난 회사에 없어도 된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이곳 회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없어도 된다. 한 번에 다 없어지면 물론 회사가 기능할 수 없으므로 안되지만, 어느 한 명이 지금 당장 자리를 영원히 비워도 조직이 돌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장도 없어도 된다. 공장장도 부문장도 없어도 된다. 본인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한 오해이고 착각이다.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만을 과도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철저히 난센스이다. 그냥 누구든 한 명쯤은 그 조직에 없어도 되는 것이다. 신입일 수도 있고 나 같은 나름 고위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은퇴를 생각하면서 내 인생 스토리를 써 보고 싶었다. 쓰려면 한 도 끝도 없겠지만, 굳이 길게 쓰기 보다는 간단하게(?)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봤다. 중간에 결혼도 하였고, 아이도 생겼고, 이사도 7번이나 했지만, 모두 생략했다. 그냥 오늘 지금 이순간 나는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궤적을 보면 향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는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난 1968년 11월생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만으로 52세하고 10개월이다. 대략 53세로 보면 될 것 같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긍정적으로 볼 필요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즉 건강 수명은 잘해야 75세 정도가 맞다. 75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것이다. 의료 혜택도 보고 거기에 정말 관리를 잘해서 80세까지 건강 수명을 누린다고 과도하게 가정해도 내게 남은 시간 건강 시간은 27년이다. 아남 산업에 들어와서 앰코코리아로 바뀐 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27년이다. 그리고 내게 남은 최대의 건강 수명이 27년이다. 이 27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계속 돈을 벌어야 하나? 계속 돈을 벌 수는 있을까? 계속 회사 생활을 해야 하나? 계속 회사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내가 이 회사에서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최대 3년으로 판단된다. (내 예측이 거의 정확했다. 초안을 쓰고 나서 2년 7개월 후에 퇴직했다) 내가 스스로 나가지 않으면 아마도 3년 후쯤이면 명예 퇴직을 권유할 확률이 70%~80% 이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 전에도 명예 퇴직을 권유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권유를 하지 않더라도 명예 퇴직 프로그램이 발표되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아내의 걱정이 많다. 퇴직하면 뭘 하려고 하느냐는 걱정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놀고 있는’ 남편을 좀 부끄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이것도 비교다. 굳이 어떤 상황을 상정하고 이런 사람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그에 비하여 나는 어떻다라고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교는 모든 분쟁과 고민의 근원이기도 하니까. 그냥 난 아침에 일어나서 뭘 하고 싶은 걸까?
일단 회사에 가고 싶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뭔가를 하고는 싶다. 뭔가를 하기는 할 것이다. 자유로운 활동. 내 의지와 의사대로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 뭔가를 해야만 해서 하는 것. 어디에 예속되어 있어서 꼭 따라야만 하는 것. 이런 활동이 아니면 될 것 같다. 꼭 회사가 그렇다. 회사는 나를 예속한다. 난 26년 8개월 동안 이 회사에 속해 있었다. 속박, 예속되어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일들을 했다. 비교적 열심히 했다. 대가를 받았으니. 그런데 하기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가끔 재미가 있었을 때가 있긴 했지만, 사실 거의 대 부분은 해야 하니까 했지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한 적은 없었다. 나의 슬픔이 여기에 있다. 모든 대가를 받는 자들의 슬픔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 좋아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데 대가를 받았으니 해야만 하는 자들의 슬픔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내 선택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좀 벗어나긴 하지만, 내가 딸아이의 유학을 허락한 이유, 딸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크게 뭐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내 딸아이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기를 바랬고, 가능하면 그나마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삶을 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기 위하여는 젊어서 혹은 배워야 시기에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한다는 말이 있고 이 말이 상당 부분 맞다. 딸아이는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정상이다. 누가 공부를 좋아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입시를 거쳤고, 대학에 떨어졌다.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지방으로는 가기 싫고 또 일본어는 재미도 있고 흥미도 좀 있어서 일본 대학을 진학하겠다고 했다. 내가 허락해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는지, 선뜻 허락을 해 주니 놀라는 눈치였던 기억이 난다.
미국은 비용 측면에서 너무 비싸서 지원이 불가하지만, 일본은 좀 저렴(?) 하다는 생각에 허락을 했다. 물론 금전적인 면이 컸지만, 그 이면에는 딸아이가 하고 싶은 것, 의지를 보이는 것에 대한 표현을 하였고, 이렇게 본인의 선택에 따라서 공부를 하면 향후 무엇을 해도 약간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악의 경우 유학을 다녀와도 취업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또 다른 문이 열리겠지 라는 근거 없는 그러나 마땅히 필요한 낙관도 있었다. 그냥 딸아이는 가능한 선에서 약간이라도 하고 싶은 뭔가를 하면서 살았으면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지원을 결정했고, 지금 지원을 하고있는 것이다. 내 퇴직 일정을 늘여 가면서 말이다.
물론 예상보다 비용이 높게 지출되어 부담이 크다. 학비가 가장 비싼 사립대학교를 선택할 가능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학비만 연 1,500만원정도. 생활비는 2,000만원이상, 기타 비용 추가하면 대략 최소 년간 4,000만원 정도다. 미국 등의 유학 비용과 비교해서는 새발의 피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내 수입으로는 높은 규모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담이 될 뿐이지.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딸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통에 나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더 오래하게 되었다. 이 또한 배부른 소리이기도 하다. 남들은 일터를 갖지 못해서 안달인데 안정적(?)이고 급여가 고정적으로 나오는 일을 하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만 강조를 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난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면서 수년간을 보내온 것이다. 급기야 은퇴카페에 가입하여 다양한 은퇴자, 은퇴 대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오지 않은 미래의 은퇴를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회사에서 아무도 나의 은퇴를 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필요가 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 나의 은퇴는 그냥 내가 결정해서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몇 가지 이유, 오로지 나로 인한 나의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삶을 살고 있는데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오히려 이 회사는 피해 주체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채워가며 다른 생각을 하고, 열정도 식어 있는 고위 준 임원에게 매월 정기 급여를 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부분을 마음속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나는 내 밥값을 두 배 이상은 하려고 하고 있다.
시키지 않은 일도 하며, 휴가는 거의 다 반납하고 일하고 있으며, 조직 관리에도 나름 최선을 다하여 역시 좋지 않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200명의 사원들을 잘 유지하면서 조직 성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 나는 정말로 여기에 있기 싫어하면서 나 이외의 200명에게는 여기에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대면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무조건 사람들을 메어 놓으려고만 하지는 않고 밖의 자유, 꿈을 꿀 자유, 생각보다 넓은 선택의 폭, 새로운 기회, 등 등에 대하여 일부 인원들에게는 터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조직을 유지하고 이끌어가기 위하여 200명의 사람들을 잘 활용하여 성과를 내는데 목적을 두고 나는 하기 싫은 일을 매일 하고 있는 것이다.
온 세상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여기에 있기 싫어하는 사람이 제일 윗자리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있기 싫어한다는 것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해 말라. 일은 한다. 심지어 매우 잘한다. 다만, 하기 싫어할 뿐이지, 한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매 시각, 매초에 내적 충돌이 발생한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에 시간을 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좋을지 자문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줄에 이끌려 몸이 일으켜 세워지듯이 일어나서 세수하고 가방 챙겨서 아파트 지하 2층으로 내려가서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몰고 송도로 오겠지. 뭐가 옳은 것인지 뭐가 맞는 것인지, 내가 과연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고 송도로 와서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럴 확률은 거의 100%이다. 이렇게 나의 남은 인생의 하루를 채워 갈 것이다. 그렇게 26년하고 8개월을 채워왔다. 지겨울 만큼. 그래서 더이상 더 어떻게 지겨워져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지금 난 그 지겨움에 목이 메여 이렇게 글을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에 휴가를 보냈다. 4일은 휴가, 2일은 주말. 총 6일간 휴가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차 마시면서 책을 보고 8시에서 9시경에 나가서 1시간가량 산책하고 들어와서 다시 책을 보고 Youtube를 보고,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Youtube를 보고, 뉴스를 보고, 책을 보고, 씻고,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다시 책을 보고, Youtube를 보고, 주식을 보고, 책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잤다. 마트를 가거나 병원을 간 적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위와 같은 일을 하면서 6일을 쉬었다. 물론 중간에 일도 했다. 이메일 보고, 파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내고.
대략적으로 이번 휴가는 좋았나? 글쎄.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보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았다. 산책을 하는 것도 정리 정돈을 하는 것도 좋았다. 그럼 남은 인생도 책을 보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고 정리 정돈을 하면 될까?
이 글을 정서하는 24년 4월 현재 난 퇴직 상태이다. 앞서 이야기한 많은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아직 좀 얼얼하다. 그래서 이 장소를 빌어서 뭐든 이야기하면서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있고, 앞으로 맞을 나머지 삶을 계획하려고 한다. 지나온 삶은 돌아보니 낙제는 아닌 것 같다. 이제 남은 삶을 잘 계획하여 조금만 더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면 이번생은 성공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내 삶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긍정적으로 결정하고 판단내리기로 했다. 여러분도 그러길 바란다.
끝
나가는 글
혹시 여기까지 다 읽었다면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씀을 드린다. 내가 봐도 지겨운 내용이고 건조한 문체이다. 이 글에서 과연 여러분들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난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내가 지나온 약 30년간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래도 비교적 잘 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부끄러운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일도 열심히 했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내 기준에서 ‘할 만큼’ 한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회사에서도 많은 인간 관계를 맺었고 비록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동료들, 특히 후배 들에게 좋은 Career path를 열어주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면서 선배의 역할을 최소한은 한 것 같다. 약간이긴 하지만 이런 부분에는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커다란 업적도 없고, 어마무시한 부를 쌓지도 않은 인생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은 이런 인생을 살지 않을까? 늘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꼬이냐고 하는 분들은 자신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는 글을 써 보길 권한다. 가감없이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 가다보면 부끄러운 점도 있지만 비교적 훌륭히 해낸 경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뭘 잘했고 어떤 좋은 일을 했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안다. 어지간하면 오지도 않을 남들의 칭찬과 인정을 기다리는 대신에 내가 내 삶을 먼저 돌아보면서 그것을 찾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