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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에 대하여

일희일비 하지 말고, 자신의 반응을 선택하라.

by Eaglecs

들어가는 글


매사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한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누가 그러지 않겠는가? 그만큼 초연하고 중용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일희일비로 꽉 차있다. 오늘 주식이 오르면 내일은 떨어진다. 입에 딱 맞는 맛난 식사를 한 후에 배탈이 난다. 최근 내가 그랬다. 월급을 타서 기분이 좋았는데 몇 일 지나니 대부분 내 통장을 스쳐지나가버리고 옅은 흔적만 계좌에 남아있다.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이 희노애락으로 가득차있고 우리는 매 순간 반응하면서 기뻤다가 즐거웠다가 그리고 곧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은 선택이라고 한다. 자신의 반응 혹은 감정마저 선택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게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난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반응과 감정까지 완벽하고 세밀하게 조절하면서 모든 상황에 성인처럼 대응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럴 자격도 없다. 나도 매우 강한 에고 때문에 그런 미세 조정이 안되서 꽤 고생을 좀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회를 통해서 어떤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시각의 전환이 가능함을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린다. 그런데 알면 뭐하나.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에고에 휘둘려서 이원성에서 허덕일텐데. 냉소적이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볼 기회가 그만큼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



매번 책을 볼 때마다 좋은 글귀를 만나게 된다. 하도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군중들 속에서 눈에 확 뜨이는 미남 미녀 혹은 매우 독특한 특색이 있는 인물이 있을 경우 그들이 내 눈에 확 들어오고 그래서 그들의 면면이 내 가슴 속에 깊이 인상이 박히듯이 책을 볼 때도 그런 문구가 있다.


오늘 만난 것은 ‘이원성의 부정’이라는 글귀이다. 이원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현상들이 서로 대립 혹은 반대가 되는 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더움과 추움, 남과 여, 흑과 백, 가난과 부, 음과 양, 이런 것들이다. 이런 이원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나 현상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의 경계는 어딘인가? 그 중간에 더운물과 미지근한물 그리고 시원한물도 있다. 굳이 순서를 정하자면 이렇다. 얼음, 얼음이 녹은 얼음같이 차가운 물, 차가운물, 시원한물, 그냥 시원함도 따듯함도 없는 물, 약간의 온기가 있는 미지근한 물, 따듯해진 물, 더운물, 뜨거운 물, 펄펄 끓는 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화된 수증기. 이것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물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이원성의 불합리성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잘 관찰해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고 할 때 어떤 것이든 100% 좋은 것도 없고 100% 나쁜 것도 없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무엇이든 어떤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자주 신문 기사로 나오기도 하지만, 복권 당첨자의 불행한 말로를 우리는 자주 접한다. 수 억이든 수 백억이든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모든 재산 그리고 가족까지 잃고 삶이 엉망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최소한 절반 이상이 재정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파국을 맞는다고 한다. 그 복권은 그 혹은 그녀에게 좋은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쁜 것이었던 것이다. 즉,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었던 것이다.


그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하였다면 그 혹은 그녀는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좋은 곳에 지출하고, 낭비와 타락을 경계하고 족함을 알았다면 재산을 다 날리지도, 가족 간에 금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파국을 맞았다면 그것이 과연 복권의 탓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올바른 정신과 밝은 마음,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과 아량 혹은 만족함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복권에 당첨이 되었더라도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당첨금이 없어도 행복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복권 당첨금을 활용할 수 있는 추가적 삶의 활용 방식이 그의 인생에 더해진 것 정도가 아닐까? 애초에 삶에 균형이 잡혀있고 만족할 줄 알고,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첨금의 존재 여부와 그 혹은 그녀의 삶의 본질적 태도와는 관련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일확 천금을 제공해 주는 복권의 당첨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복권이 당첨된 객관적 사실에 불과할 뿐이다. 거기에 매몰되어 몸과 정신이 팔리면 그 후 사단이 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도 회사 생활을 했을 때 많은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럴 일이 아니다. 매우 지극히 당연히 불만이 될 만한 것이 아닌데 막상 그런 상황에 빠지면 거기에 압도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도 재직시 많은 상사를 경험했는데 정말 한 분 한 분 다 달랐다.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다. 내가 젊고 어렸을 때는 감내할 만했던 상사의 다양한 압박이나 언어적 표현도 내가 경험이 증가하고(아는 것도 늘어나고) 나이도 꽤 들어서 상사와 비슷하게 되자 그 압박의 강도가 과거와 같더라도 내가 느끼는 것은 그 압박만이 아니었다. 내적으로 커진 자아(에고)와 자존심 그리고 여전히 미완성인 나의 인격이 문제였다. 그래서 간혹 모멸감까지 들은 적도 있었다.


전혀 나와 생각, 태도 그리고 관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것 특히 내가 지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인 경우엔 문제가 되었었다. 그런 상황을 슬기롭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주파수가 동조 되도록 잘 맞추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잡음이 생겼고, 재직 말년에 그런 잡음이 적지 않았다. 내가 처해진 그런 상황이 싫어서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고 얼굴에는 누가 봐도 나의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드러내고 다녔을 정도이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광경이다. 어쩌겠는가? 이미 지났으니.


나는 이 글에서 단지 누구의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또한 대부분 나의 탓이지 그들의 탓은 적었기 때문이다. 나도 나름대로 삶 속에서 만나게 될 다양한 인간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고 공부하였지만, 나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지시나 인격적 처우를 받는 경우 나의 공부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 불편하고 힘이 들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하지만 그건 나의 에고 때문이다. 왜 에고에 쓸데없이 집착을 했었는지 아쉬운 마음이다. 아마도 나이를 먹긴 했지만, 여전히 혈기 왕성하고 젊어서 에너지가 넘쳐서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 인고의 시절을 몇 년 보내고 나서 이제 가만히 뒤 돌아다 보니, 결코 그 시간이 내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내게 진실로 부족한 뭔가에 대한 성장을 위한 수업 시간이었던 것이다. 너무 긍정적인가? 그런데 사실이다.


난 당시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끄럽게도 자아가 강하니 불평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내 후배나 아래 직원들에 대하여는 비교적 포용적이어서 그들이 어떤 실수를 해도 그 실수를 덮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물론 내 생각이다. 그들이 실수를 했다면 그 뒤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면 거의 다 그렇게 확인 결과가 도출되곤 했다. 따라서 그들을 비난하나 꾸짓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잘못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니 그걸 하나하나 꼬집어서 상처를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 잘못을 덮어주고 가르쳐 주고 보완해 주는 것이 상급자의 역할이고, 그 잘못으로부터 파생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 상사의 의무인데, 잘못만 지적하고 특히 감정을 실어서 모멸감까지 주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철저히 유기하는 매우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그렇게 하지 말자'고 재직 내내 다짐했던 부분이기도 했었다.


내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내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우를 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피로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매우 사소한 사항이라도 트집을 잡아서 사사건건 지적하고, 지적의 품질도 세련되지 못했다. 가끔 맞는 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아주 가끔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기대되는 수준 이하의 역량을 가진 사람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꽤 도전적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얼마나 잘났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는데, 사실 나도 그들과 역량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난 역량이나 능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현실에 처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거기에 적응하며 그에 맞춰서 일을 하고 일어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데, 난 계속 그들이 그러지 말기를 기대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의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불평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나도 지극히 일반적인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매 순간 그래서 자각하면서 나 스스로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매우 어렵다. 그래서 전술했듯이 나도 재직 말년에 꽤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지난 지난 몇 년간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물론 지금은 완벽하게 헤어났다. 퇴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젠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고 무엇이 부족했는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오랜 세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원성에 속박되어 있었다. 완벽한 속박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꽤 강한 강도로 묶여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기대했다는 것부터 내가 어떤 나만의 기대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나의 불만과 불평은 나와 다른 사람들도 결국 나와 다를바 없는 평범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는 기대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기 때문에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원성은 우리 삶에서 상당기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끝없는 반목과 질투 그리고 투쟁과 경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됨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원성에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에서 나의 중심을 잘 잡고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이원성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둘이 평행선을 끝까지 달리면 결국 그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한 쪽이 다른 한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각도를 틀면 머지않아 그 둘은 만나게 될 것이다. 즉 화합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달리는 방향을 틀기를 기대하지 말고 당신이 먼저 그쪽으로 향하여 몸을 기울이는 것이 어떨까?






나가는 글.


오늘의 주제와 같은 형태가 구체적으로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추상적 주제는 늘 나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내가 구성한 문장이 맞는지, 서두에서 말한 것을 뒷 부분에서도 계속 그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도대체 왜 이런 내 수준에 맞지도 않는 어려운 단어를 끄집어 내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좀 억지이긴 하지만, 난 이런 종류의 글을 작성하고 나면, 마치 5km 정도를 완주한 후에 숨을 헐떡이면서 땀을 닦음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뭔가 후련하고 개운한 느낌을 받는다.


나만 후련하고 이 글을 혹시라도 읽은 분들은 무슨 고생인지 미안할 뿐이다. 아마도 문장 하나하나 뜯어봐 가면서 꼼꼼이 읽는 분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여러분들께 큰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중이다. 시간을 좀 빼앗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도 이렇게 재미없는 글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귀한 시간을 투자했으미, 뭔가 얻은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아니라 여러분이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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