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하자. 나쁜일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따지지 말고, 당신을 활기차기 만드는 것이 무어인지 물어보고 그걸 행하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활기찬 사람들이다. (by Howard Thurman, 신학자)
좋은 말이다. 활기는 활발한 기운, 즉 활발한 에너지를 의미한다. 위 문장은 세상이 원하는 것이 활기라는 말로 들린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활기찬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활기는 어떤 움직임을 뜻한다. 육체적인 움직임이 없더라도 강한 눈빛과 의지 또한 누군가의 활기를 대변할 수 있다. 뭔가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바로 활기이다.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세상은 에너지로 움직인다. 차도 에너지로 움직이고, 회사도 에너지 덩어리인 직원들의 합이 뭉쳐져서 강력한 에너지가 발생되어야 움직인다. 노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골프에서 공을 앞쪽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게 하려면 고도의 집중력과 그것을 통해 분출되는 파워가 가미되어야 하며, 이것은 바로 응축된 에너지의 분출 그 자체이다.
온 세상은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선택의 문제라고도 한다. 허공에 가득차 있어서 마시기만 하면 되는 공기처럼 온 공간에 가득차 있는 에너지는 의지를 갖고 선택하여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데 문제는 그게 숨을 쉬는 것처럼 본능에 따라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온 대기에 가득차 있는 에너지를 흡수하여 활용하려면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긍정의 의지, 수용의 의지, 사랑의 의지, 이타심과 같은 것 등 다양한 요소가 가슴속에 존재할 때에야 비로서 온 공간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조금씩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가득 찰 때 당신의 의지는 극대화 될 수 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힘이 나면서 긍정적인 생각이 들고 좀 더 포용적인 생각이 들 때가? 한 마디로 그냥 좀 힘이 날 때가 있다. 몸에 활력이 서서히 차오르는 그런 느낌말이다. 나도 자주 느끼는 편이다. 어려서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나이가 먹어가고 경험이 쌓여 가면서 그런 순간이 미미하게 나마 조금씩 증가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을 지니고 있을 때면, 그 어떤 위기나 어려운 순간, 불쾌한 순간이 다가와도 거기에 매몰되는 경우가 적다. 과거엔 의식적으로 매몰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젠 거의 자동으로 모든 순간을 객관화하게 된다. 내가 나를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행동과 감정을 제 3 자의 입장에서 보고 평가하고 그 다음의 언행과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전에 있던 일인데, 인천 만수동에 있는 형 집에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갔는데, 그 동네가 워낙 오래된 아파트 단지여서 주차가 아주 곤란한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가다보니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었고, 따라서 동네를 두 바퀴 정도 돌다가 가까스로 도로변에 주차할만한 작은 틈을 하나 발견하여 주차를 하다가 실수로 기어를 후진 대신 D를 놓고 악셀을 살짝 밟았다. 결과는? 바로 앞 10cm 앞에 주차되어 있는 산타페를 콩 하고 박았다. 워낙 좁은 공간에서 어렵게 차를 주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물론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냥 도망갈까라는 생각은 아예 없었고, 일단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내차와 상대 차량을 살폈다. 상대 차량은 범퍼에 자국이 약간 난 정도 였고, 내 차는 번호판이 찌그러지고 번호판을 두르고 있는 플라스틱 테두리가 깨져있었다.
돌이켜서 그 순간을 생각해 보면, 짜증이나 놀라움 그리고 화 같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매우 놀랍게도, 과연 저 차의 범퍼에 생긴 자국이 내 차로 인하여 생긴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는 것이었다. 자국이 약간 녹색이었는데, 내 차의 번호판은 전혀 그런 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크게 박은 것도 아니고(10cm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니), 원래 범퍼의 기능인 완충 역할도 거의 할 필요 없을 정도의 미미한 접촉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차로 인하여 생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일단 내 차의 번호판 테두리가 깨졌기 때문에 일정한 압력이 가해 진 것은 맞고, 그리고 범퍼의 도색 밑면, 즉 원래 범퍼의 색갈이 녹색이라면 겉의 페인트가 벗겨진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약간의 가능성, 즉 내가 만든 상처일 가능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차주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차량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 후는? 뻔하지만, 차량의 확인, 명절 아침에 불편하게 하여 매우 죄송하다는 사과, 보험사에 신고하여 사고 번호 접수, 서로 전화 번호 교환 그리고 끝. 이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번거롭고 짜증나는 순간인데, 난 이상하리 만치 그런 느낌이 없었다. 장기간 '습관화'한 덕분인가? 그냥 내 생각에 좀 더 현명해 진 것 뿐일 것이리라. 거기에서 자신에게 화를 내 봐야 무슨 득이 있을 것이며, 한탄을 해 봐야 또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는가? 억울해 하면? 역시 아무런 좋은 결과값을 얻을 수 없다. 혹은 도망가면? 이건 더 최악이다. 푼돈에 나를 속여야 하는 상황을 나 스스로 만드는 것 만큼 멍청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사고 총량의 법칙. 즉, 이것도 교통 사고다. 사람에게는 개인별로 교통 사고가 날 확률 같은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그때 믿기로 했다. 나는 이걸로 그 횟수 1개를 퉁친 것이라고 해석을 해 버렸다. 아무런 인명 사고도 없고, 비용도 최대 자차 부담 20만원이다. 보험 할증도 없다. 게다가 내 차량의 경우 꽤 오래 사용한 낡은 차량이기 때문에 전혀 차량 손상에 대한 아쉬움 또한 없다. 심지어 상대 차량도 국산 구형 산타페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범퍼를 갈아도 비용이 보험 처리 한도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내 차 대신에 그래도 비교적 신형인 아내의 차를 가져왔고 그 차가 가해 차량이 되었다면 아내가 불편해 하면서 내게 짜증을 낼 수도있고, 또 비교적 새차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에 기분이 나쁠 가능성도 있는데 그런 문제 또한 없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번 접촉 사고는 행운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차량이 충돌했던 그 시점에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을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서 들었었다. 객관화의 힘이다. 모든 문제를 더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 것이다. 글을 적다 보니 '활기찬 사람들' 이라는 제목과는 매치가 되지 않아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제목에서 벗어난 내용은 아니다. 즉, 어떤 면에서 내게 정말 좋은 에너지가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대처가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거다. 아니 그게 맞다. 활기, 강한 긍정의 에너지가 내 몸과 마음 속에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을 강구하고 매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내게도 세상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힘이 일정 부분 있는 것 같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힘 말이다. 최소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사소한 사고였지만 매우 현명하고 현실적으로 대응하여 매끄럽게 처리하지 않았는가? 이런 조정과 조율의 힘도 세상에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걸 잊지 말자. 우리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우리 한명 한명은 세상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고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활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좀 더 강한 책임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내 몸에 활기가 더 도는 느낌도 든다. 내게는 매우 충분해서 남아 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약간은 나눌 여력이 있는 긍정의 에너지가 있다. 재직 중에는 그런 에너지를 주로 어리버리한 신입들에게 '주입'해 주기 위하여 노력했었다.
무엇이 되었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나눌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나눌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나눌 능력이 조금있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고 행복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제한적 나눔이 가능하더라도 그 외적인 영역에서는 생각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눔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활기찬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