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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벗을 가진 행복

by Eaglecs




有朋自遠方來


'논어'의 學而篇(학이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람이 알지 못해도 노엽게 생각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어제 양평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는 나의 '벗'이다. 친구는 일반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통칭한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잦은 대화도 하는 사람 정도이다. 그냥 잘 모르는 사람을 칭할 때도 '그 친구있잖아?' 라는 식으로 친구라는 말을 쓴다. 반면 벗은 더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벗있잖아?' 라는 식으로 벗을 칭하지는 않는다. 친구와 벗은 그렇게 완전히 다르다. 서로의 사생활을 공유하고 서로의 비밀을 지키는 등 일반적인 친구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할 때 '벗'이 될 수 있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도 같은 대학 그리고 같은 과를 나온 나의 벗이 지금 양평으로 터전을 옮겼고 거기에서 나름의 사업을 하고 있는데, 퇴직으로 시간 여유가 생긴 내가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찾았고(유붕자원 방래) 그는 매우 즐거워했다(불역낙호). 물론 나도 즐거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잘해야 일년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하거나 문자 정도만 주고 받아 왔고 실제로 다시 얼굴을 본 것은 5년도 더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어색함이나 불편함도 없었고 그런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친밀한 벗에게로 아주 편한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양평까지는 대중교통이 연결되어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3시간만에 도착했고 이내 반갑기만 한 그 '벗'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 찾아준 '벗'을 위하여 나의 '벗'은 완전 풀코스로 동선을 준비하여 내가 머물렀던 4시간 남짓한 시간을 꽉 채워주었다. 그 순간 만큼은 내가 과거 3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섞이지 않는 내밀한 '친구'로서 나눌 수 있는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의 배웅을 받고 다시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나의 발걸음은 아쉬움과 더불어 뭔가 뿌듯하고 기쁜 감정에 쉽싸여 가볍게 계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벗'이된 이유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 그와 오랜 '벗'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배려와 상호 존중 그리고 양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가까운 친구였지만 나나 그는 서로에 대한 배려를 잃은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야 서로 쌍시옷이 들어간 말도 섞었지만 그 젊은 시절을 지낸 이후에는 거의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서로가 친구이자 벗이지만 꽤 존경할 만한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어도 순화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친밀한 사이라도 늘 서로 양보를 했던 것 같다. 내 생각엔 내가 더 많은 배려와 양보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나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벗'으로 진화해 갔다. 물론 서로 기쁨도 공유했고 슬픔 또한 공유했다. 봉투만 주고 받는 공허한 공유가 아니라 진정한 슬픔과 기쁨을 공유했던 것 같다.


이런 오랜 과정을 통해서 둘의 관계는 농밀해져갔고 결국엔 평소에 별 소통을 하지 않아도 늘 그대로인 수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진정한 '벗'의 단계로 발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년간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다시 만났을 때 그 어떤 이질감이나 낯섦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절교가 불가능한 '벗'


'벗'과는 절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절교한 '벗'이 있다면 그는 어쩌면 '벗'은 아니었고 '좀 더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진정한 벗은 또 한 명의 '나 자신'이다. 나를 나와 절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나 자신'과 절교한다면 내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데 어떻게 절교가 가능하고 어떻게 멀어질 수 있을 것인가?


당신에게 만약 진정한 '벗'이 있다면 당신과 당신 친구의 정신적 에너지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반증할 것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받아들임'의 단계에 있지 않고서는 진정한 '벗'을 갖기도 어렵고 자신이 누군가의 '벗'이 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타인과 잘 어울려야 하고, 서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줄 수 있어야 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도 해야 한다. 서로 탓하지도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서로 늘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하고 어떤 거짓도 없이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나눌 수도 있어야 한다. '받아들임'의 수준이 유지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특별한 기대 없이 단지 서로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관계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신이나 당신의 '벗'이 서로 이런 사람이라면 잘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벗'은 상호적이기 때문에 당신만 '받아들임'의 상태에 있으면 당신의 벗과는 진정한 '벗'의 관계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내가 '받아들임의 상태에 있어도 상대가 그 수준이 아니면 상호 작용은 일어나지 않고 '벗'의 관계가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벗'의 관계를 단 한명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삶에 있어서 정말 큰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은 누구의 벗인가? 그리고 당신의 벗은 누구인가?


나는 어제 만나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나의 '벗'의 '벗'이다. 나의 '벗'과 40년간 우정을 이어오면서 공고해진 '벗'의 강도는 상당히 견고하여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제로 그나 나나 욕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하여 이견이 생긴적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호관계에 있어서 긴장의 요소가 발생할 가능성 또한 0에 가깝다. 배려와 상호 존중 그리고 양보로 견고하게 쌓아온 우정이기 때문에 그걸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가 그의 '벗'인 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도 내가 그의 '벗'인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마주할 때마다 강렬하게 보내주는 신뢰와 우정의 기운을 분명히 내가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수 많은 아는 사람들이 있다. SNS를 통하여 수천 수만의 사람과 소통한다. 평범한 삶들도 카톡 친구가 수백명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속에서 끝도 없는 관계가 만들어졌다가 허물어지곤 한다. 그러는 과정을 통과해 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어간다. 길고도 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들어진 많은 관계 속에서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릴 수 없는 진정한 '벗'과의 관계가 과연 내게 존재하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조건을 배제하였을 때에도 그 혹은 그녀가 당신의 '벗'일까? 그리고 당신은 그 혹은 그녀의 진정한 '벗'일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배신이 난무하고 불신과 상호 불이해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물론 대다수의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족간에도 진실한 사랑과 배려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결국 애초에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배려와 양보 그리고 상호 존중이 가능한 관계를 수립하기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동안 '벗'으로 생각한 관계가 정말 맞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당신(물론 나도 마찬 가지다)은 정말 누군가의 '벗'이 맞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가? 크게 낙담할 필요 없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어도 반성은 해야 한다. 혹시 당신이 진정한 '벗'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벗'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는 먼저 '벗'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배려와 양보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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