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맛

그때는 몰랐던 마음

by 허은숙

​자갈치에서 평화시장까지 걸었다. 세월을 맛보고 추억을 입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지만,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들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긴 부산의 옛 도심이 그랬고, 그 곁을 지키는 우리 마음이 그랬다.


​자갈치 시장의 활기는 여전했다. 펄떡이는 생선들 사이에서 투박한 사투리가 오간다. 우리도 그 풍경 속에 섞여 앉아 횟감을 골랐다. 3층 회센터에 자리 잡고 투명한 생선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입안을 감도는 찰진 식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우리 전에도 여기서 배 터지게 먹었잖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젓가락 하나에도 까르르 웃던 그 시절 우리가 지금 우리와 겹쳐 보였다. 그때는 그랬었지! 속마음은 두고 겉모습만 사랑하든 시절이었다.


​회를 든든히 먹고 나선 국제시장 ㆍ깡통시장ㆍ 평화시장 골목길은 마치 거대한 추억의 보물창고 같았다. 미로처럼 얽힌 시장 골목귀퉁이에서 쌍화차를 훌쩍이고, 호떡을 먹고. 서로의 모자를 고르고, 봐주며 쇼핑을 즐겼다. 백화점의 세련된 조명은 없어도, 시장 가판대 위에서 고른 물건들은 가격부터 왠지 모를 정겨움이 묻어 있었다.


​특히, 이번 겨울을 함께 할 모자를 고를 때가 행복했다. 서로의 머리에 투박한 털모자를 씌워주며 "이건 너무 늙어 보인다 " "이건 딱 네 스타일이다"라며 장난 섞인 핀잔을 주고받았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아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스무 살 시절 수다쟁이 그대로였다. 우리는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포근한 겨울 모자 하나씩 품에 안았다.


​새 모자를 머리에 쓰니 보들보들한 온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그 온기보다 더 따뜻했던 것은, 모자 깃을 매만져주던 친구의 다정한 손길이었다. "사람은 옛사람이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을 생각한다. 그것은 자갈치 시장의 생선회처럼 씹을수록 고소하고, 평화시장의 골목길처럼 구석구석 정이 묻어나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각자 갈 길이 다르다. 경전선 열차로, 시외버스로, 무궁화 열차에 카톡이 오고 간다. 함께한 추억가방 속엔 오늘 산 새 모자가 들어있다. 머릿속은 친구들 목소리로 가득 찼다. 세월의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져 이제는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모난 돌이 된 사람들. 올겨울은 오늘 산 모자 덕분에, 그리고 그 모자를 함께 골라준 친구들 마음 덕분에 유난히 따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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