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타박 Jun 16. 2024

억울해도 침묵할 용기

가족 관계


나는 남자치고는 감정적으로 섬세한 편이다. 감동도 잘 주고 상처도 잘 준다. 그래서 어렸을 때 가족들과 사이가 좋을 땐 츤데레처럼 잘 챙겨주면서, 싸울 땐 정말 가슴에 못을 박는 언행도 많이 했다.



"너 어릴 때 애들한테 장난 엄청 많이 쳤잖아.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넌 감정적으로 섬세한 편이 아닌 것 같아."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근데 감정적으로 섬세하지 못한 것과 윤리적이지 못한 건 다른 의미다. 감정적으로 섬세해서 상대가 상처를 받을 걸 예측할 수 있어도 비윤리적인 의도로 행동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가 '소시오패스'다.



나는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편이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은 '조언'이라 생각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비판은 '참견' 또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참견이라 판단되면 말을 아끼고, 조언이라 생각되면 그제야 말을 해줄지 말지 고민한다. 좋은 비판이라도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이유는, 말을 줄여서 안 좋은 일이 발생하진 않아서다. 좋은 조언이라도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땐 말을 줄이는 게 지혜로운 건 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그냥 내뱉었다. 억울할 땐 말을 안 하면 바보라고 생각했다.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주장하고, 상대의 말이 틀리다 생각하면 강하게 반박했다. 그리고 화가 나면 강하게 짜증 냈다. 후진은 없었다. 물론, 주장을 많이 하고 비판을 많이 하는 태도 덕분에 많은 배움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진 없는 태도가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족들에게는 더 그랬다. 밖에 나가서는 낯선 사람들과 교류해야 했기에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가족들은 어린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깝고 편한 존재였기에 이놈의 아@가리에 필터가 없었다.  얼마나 가족들 속을 썩이는 말을 많이 했는지.. ;( 그래도 고등학생 때부터는 점점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자연스레 대화의 빈도도 줄었다. 부모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도 줄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오히려 부모님과의 대화가 늘었다. 다행히 나도 사회화가 되고 성숙해지려는 척을 한 덕분인지 부모님과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나이가 점점 늘고 있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부모님의 짜증이 늘어남을 느꼈다. 이젠 내가 아니라 부모님께서 화가 많이 생기시는 듯했다. 속상하게도, 이성적인 판단 위주셨던 부모님이 점점 감정적인 판단을 하시는 순간이 늘어나는 듯했다.



옛날 같았으면 부모님이 짜증을 내시면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다. 토론을 빙자한 피 터지는 자강두천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강일천(=자존심이 강한 한 천재)이다. 나는 부모님의 진심을 아니까, 부모님 상대로는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음을 인지하고 있다. 부모님의 짜증이 늘면 속상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침묵한다.




침묵한다..




그리고 또 침묵했다. 침묵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부리는 짜증에 대해 생각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을 비판하는 게 아닌, 짜증을 내게 되는 '상황'을 생각했다.



"화는,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것이다. 인간은 하위 단계의 뜻과, 상위 단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상위 단계의 뜻은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차적인 하위 단계의 뜻을 차츰 해결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얻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족과 공유한다. 가족이랑 행복하려고 노력하는데,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트러블을 가족과 공유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렇게 인간은 가끔 본질을 망각한다."



"침묵하자. 그리고 본질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달으면, 그때 입을 열자."



가끔은 이 침묵이 묵혀 속이 심하게 답답할 지경까지 도달한 적이 있었다. 카카오톡으로 부모님의 짜증을 들었을 때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본능적으로 1,000자 가까이 반박 팩트 폭격을 작성한 적이 몇 번 있다. 물론 그 순간에도 겨우 참았다.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이 드는 동시에, 이 카톡을 안 보내면 몇 시간 뒤의 내가 정말 다행스럽게 여길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몇 시간 뒤의 나는, 앞서 반박 카톡 보내기를 참은 걸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내 반박 팩트 폭격 1,000자 카톡을 읽고 스스로가 틀렸고 감정에 휩쓸려 아들에게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며 자책할 부모님을 상상하니... 참은 게 천만다행이라 46,000번 생각했다.



반박 팩트 폭격



부모님과의 여러 갈등 순간에 결국엔 침묵하고 부모님의 화를 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1순위'라는 명백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알고도 얼굴을 붉히는 건 오로지 본능에 의한 붉힘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왜 있겠으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본능적일 필요가 왜 있겠는가.



그저, 포용하고 인내하자.



말을 줄이는 게 요즘 들어 참 보물 같은 기술이라 여겨진다.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기술이다. 끊임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싶다. 침묵하기 연습.



(2023. 11. 14)

작가의 이전글 누구나 겪는 감정적 슬럼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