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 위버멘쉬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진리란 성경의 내용이다. 성경이 곧 세상의 정답이자 선악이 정의되는 기준이다.
예수는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인간세계로 내려왔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짓는다.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해 주었지만, 결국 죄악을 사랑해버리는 모순이 생긴다. 기독교에서 죄를 극복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예수는 사랑하는 인간 대신 죄를 극복하신다.
현재의 우리가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만이 스스로 죄를 극복하며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스스로 죄악도 극복하지 못하는 대단히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예수를 지지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을 느끼는 마음과 불행을 느끼는 마음의 가운데에 선이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는 그 선 밑에서 마음이 변동하고 구원받은 자는 선 위에서 변동한다. 즉 더 불행하거나 덜 불행한 삶, 그리고 행복하거나 더 행복한 삶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노력으로 구원을 대신하려 애써도 본질을 거스를 수는 없다. 오로지 신만이 생명을 부여하고 회복시킬 수 있다. 신앙의 심지가 굵은 자가 말한다.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흩어진 본질을 모아 성경을 읽으라. 그리고 구원받으리라."
기독교인들의 삶은 회복되고 있다. 세상의 본질을 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길라잡이는 성경 안에 이미 존재한다. 점차 사랑을 나누는 능력을 배운다.
/
하지만 나의 삶에서 아직 진리는 정의되지 않았다. 진리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이며, 인간의 능력은 진리를 정의하기에 한계를 가진다. 성경에서 정의된 죄악이 있고, 그러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죄악을 저지른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는가? 죄악은 왜 저지르면 안 되는가?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왜 안 되지?"
"···"
구원받은 자이든 받지 못한 자이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이 세상의 본질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의도가 동일하다. 그리고 인간이란 생명체는 본질을 추구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까지도 동일하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떤 하나(예수의 말)를 정답으로 규정하고 그 답을 믿기로 다짐한 사람이 구원받은 자이고,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 결론 내린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나는 구원받지 못한 존재다. 적어도 '그들의 기준'에서는.
나의 믿음은 아직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놓여있다. 절대적인 진리란 무엇인가.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마 누구도 정의 내릴 수 없다. 신이 정의 내린 걸 믿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직접 세상에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우리가 신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내가 방금 인간은 신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직접 정의 내려버렸다)
나는 도무지 남이 주장하는 자신의 행복에 반박할 수 없다. 설령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도무지 그의 주장에 반박할 수 없다. 그만큼이나 인간 생명체의 마음은 독립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이라면 살인자에게 강한 질책을 퍼부을 것이다. 그것은 천벌받을 짓이며 지옥에나 갈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질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살인자에게 직접 질책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소리치는 건 살인자에 대한 직접적인 질책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빌린 간접적인 질책이다. 그들은 살인자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자신(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 속의 말을 지지할 뿐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성경을 지지한다.
진리의 절대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신은 죽었다". 나는 이 말에 대해 ‘모더니즘을 존중하되 극단적 모더니즘만을 주의하자’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폭력에 휘둘리기만 할 뿐이다. 강한 억압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철학하라.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지만 부패한 신을 몰락시킬 수는 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창조하는 삶은 곧 신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신은 믿음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세상에 신은 없다.
신이 없는 세상에 살아 숨쉬는 사람은 극복하는 사나이, Superman, 아니 Overman.
즉 위버멘쉬 (Übermensch)!!
믿음이 신에게로 흐른다면 내 마음에 예수를, 믿음이 나에게로 흐른다면 내 마음에 초인을 섬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