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청 황제 홍타이지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간 조선 정부는 나라의 국운이 다해가는 상황에서도 새해를 맞아 북경에 있는 명 황제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부하에게 조선의 왕이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명 황제'라는 사실을 듣게 된 홍타이지는 화를내기는커녕 오히려 홍이포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헤쳐버리겠다는 신하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두어라.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홍타이지는 어찌보면 매우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관성적으로 행해져온 조선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통해 전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의 통치자로서 자신의 아량과 배포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행직 공무원으로 일을 하다보면 교사나 공무직들과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특히 업무분장이 애매한 공문이 하달될 때면 평소에 하하호호 즐겁게 지내던 사이라도 업무를 떠맡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정색을 하고 경우에 따라선 언성을 높인다.
당연히 눈 앞에서 내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게 당연하다. 가끔은 교행직이 학교에서 너무 소수라 불이익을 받고 있는게 아닌가란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어찌보면 교사라는 집단, 공무직이라는 집단 모두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들도 이해관계만 얽히지 않으면 금세 좋은 친구 혹은 동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정색을 하고 언성을 높이는 것에 대해 내가 화를 내고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조금만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면, 내 입장에선 이기적이고 뻔뻔스럽기 그지 없게 느껴지는 그들도 그저 밥벌이를 위해 억지로 몸을 이끌고 나와 가면을 쓰고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하고 있는 불쌍한 직장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갈등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학교라는 구조적 한계에 대해선 당연히 화가 날 지언정 사람 개개인에 대해 화를 내고 혐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화를 내고 그들을 증오하면 할수록 직장에 과몰입하여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퇴근 후의 고귀하고 소중한 내 시간을 오염시킨다.
그래서 나는 교사가 됐든 공무직이 됐든 업무적 문제로 나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면 잠깐 운동장에 나가 차가운 공기를 들여마신 뒤, 청황제 홍타이지의 저 대사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