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을 공부하다 타겟이 되었다

by 열정피자

평일 낮 1시, 역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

시끌벅적한 마음을 잠재우려 심리 코너를 기웃거리는게 내 요즘 소소한 힐링거리이다.


그날은 유독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설마 나도 나르시시스트인가'하는 묘한 의구심에 빠져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2030을 대상으로 성격, 기질 검사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누가봐도 맑눈광의 싱그러움을 장착한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평소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을텐데, 그날은 이상했다.

책 속에서 자아를 찾던 갈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어린 여자의 맑고 싱그러운 에너지가 어두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걸까?


"아, 심리검사요? 어떤...?"


그녀는 본인을 XX 홍보팀의 OOO라고 소개하며, 사내 프로그램을 2030 대상으로 넓히기 위해 데이터 수집 중이라고 했다.

곧 약속 시간이 다가와 서둘러야 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번호를 적어 주었다.

글자 하나 제대로 읽지 않은 '개인정보 수집 동의서'에 정성껏 서명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날 오후, 친구와 실컷 낮술을 마시고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향했다. 때맞춰 그 여학생에게 연락이 왔고, 다음 날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술기운인지 더욱더 외롭게 울렁이는 마음의 해결책이 왠지 검사결과에 우연히 나오진 않을까 기대까지 하면서.




그 다음날. 이번엔 2명이었다.

2번째봤다고 더욱더 친숙한 느낌이 드는 어제본 여자와 처음보는 화장기없는 풋풋한, 데이터분석가라고 자기를 소개하던 또다른 여자.

어쨋든 두 명의 어린 여자가 30대 후반의 푸석한 나를 호기심넘치게 바라보며 나를 마치 연구가치가 높은 귀한 샘플 다루듯 질문을 쏟아냈다.


요즘 어떤 것이 스트레스냐, 스트레스 받으면 어떻게 해결하냐, 내적요인과 외적요인 중 어떤 것이 더 스트레스에 많이 작용하냐, 등등등


인터뷰를 받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고, 질문에 정성껏 답하는 내 모습이 퍽 스마트해 보인다고 착각했다.


대화 도중 그 싱그러운 여자는 자신의 본업이 운동선수이며, 지인들과 창업한 마케팅 부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운동선수? 관심이 확 갔다. 도리어 내가 이것저것 묻자 그녀는 "체육관으로 체험하러 오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나는 새로운 취미가 생기겠다는 기대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묘한 의구심은 뒤이어 찾아왔다. 이 프로그램이 검사 후 무려 '6회기의 무료 상담'으로 이어진다는 것.


"몇 명을 데이터로 수집하는거에요? 상담 6회차면 꽤 비용이 큰데, 이게 진짜 무료가 맞나요?"


"네, 제가 홍보한 사람은 3명 정도이구요. 데이터수집은 양적보다 질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


완벽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새로운 체육관'과 '새로운 취미'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러고 그날저녁, 친구를 만나서 재미난 에피소드라며 얘기를 털어놓자,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그거 이상한 곳 아냐?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몇 명이 너 하나에게 이렇게 공들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돼"


"아냐. 그럴 것 같지 않는 젊은 여자였다니까" 그 여자의 귀염뽀짝한 카톡프사까지 내보이며 항변했지만 말하는 동시에 점점 뭔가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상황의 99가지 신호를 뒤엎었던 확신 1가지가 그저 밝고 싱그러운 에너지의 젊은 여학생이라는게 다라니..


친구는 평일 낮에 심리코너에 서성이는 여자 자체가 타겟이었을거라며 아직도 세상을 그렇게도 모르냐며 날 꾸짖었다


최면에 걸려 정신없이 짓고 있는 집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뭐였을까?

평소에 그렇게도 똑부러지다고 자부한 내가 왜 이런 말도없는 상황에 확신을 가졌던걸까


요즘 약해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저 어린 그 에너지가 부러워서였을까


내 마음을 홀린건 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