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기에 돌입하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건 바로 아이를 돌보다가 짬이 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뜨개'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던 4년 전,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태교를 해볼 겸 뜨개공방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서툰 솜씨 탓에 코를 잘못 잡아 열심히 뜬 편물을 여러 번 풀어야 했다.
(뜨개인들은 이걸 일명 '푸르시오'라고 부른다.)
어깨와 손목의 저릿한 고통을 덤으로 얻고 나서야 모자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작을 보니 뿌듯함이 컸지만 자본주의 원리대로 뜨개의 경제성을 생각해 보니 영 별로였다.
실값과 바늘값 거기다 나의 노동력까지. 손목이 아파 붙인 파스값이 더 나오겠다 싶었다.
'앞으론 차라리 모자를 사고 말지' 하는 생각도 들어 다시는 뜨개를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둘째를 낳고 다시 뜨개에 푹 빠졌다. 아이가 잘 때 틈틈이 가방에, 티코스터에, 수세미에 요즘엔 조끼까지 뜨고 있다. 심지어 '아무튼 뜨개'라는 책도 함께 읽고 있다. 장시간 뜨개로 손목과 손가락 관절이 아플 때면 이 책을 꺼내 읽고 그러다 곧 손이 근질근질해지면 다시 실을 꺼낸다.
이 정도면 나도 뜨개인이 되어가는 걸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도대체 뜨개질을 왜해? 손 안아파? 그 모자 만원이면 사는데?
나도 안다. 뜨개가 지루~해보인다는걸.
그럼 나는 대체 왜 뜨개를 하냐고?
회사에서 누구보다 일의 효율성을 중시하던 내가 비효율적인 뜨개가 좋아진 건,
요즘 내가 비효율의 끝판왕일지도 모를 '육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아와 뜨개는 닮은 점이 참 많다.
뜨개를 하다 보면 반복적이고 단순한 과정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한 코 한 코 성실히 쌓아가며 완성된 뜨개 작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기계로 뚝딱뚝딱 찍어내 마트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는 수세미를 3시간이나 걸려 완성하고 나면 그 과정을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색의 실을 선택할까?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볼까? 배색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시간과
뜨개를 하며 좋아하는 음악,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시간은 어느새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 수세미에 담긴다. 결코 기성품과 같을 수 없다.
'아무튼 뜨개'책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나아갈 수 있는 일을 누군가 꽉 막힌 활동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뜨개보다 꽉 막힌 활동은 없다. 뜨개에는 지름길도 요령도 없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걷다가 지루해지면 자전거나 자동차를 탈 수 있다. 하지만 뜨개에는 속도를 낼 수 있는 다른 수단도, 돌아갈 수 있는 다른 길도 없다."
육아와 뜨개는 참 많이 닮았다.
육아는 요령을 부릴 수가 없다. 자고 싶은 시간에 잘 수도, 먹고 싶은 시간에 마음 편히 먹을 수도 없다. 우는 아이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도 더 큰 울음이 대답으로 돌아오는 이 답답하고 기막힌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 육아의 지고지순함이 꼭 뜨개같다.
그럼 요령을 부릴 수 없다고 육아를 그만둘 수 있나?
당연히 아니다. 한번 뜨개를 시작하면 나의 여러 생각이 편물에 자연스레 쌓이듯
육아에도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래서 어느새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이 아이를 기꺼이 조건 없이, 기약 없이 키워낸다.
내 아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아이에게 우리만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 아닐까?
조끼를 뜨는 과정, 목도리를 뜨는 과정. 이 과정을 묵묵히 이어나가면 멋진 작품이 된다.
자동화시스템으로 공산품이 넘쳐나고
AI가 사람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요즘.
요즘의 것들을 기준으로 뜨개와 육아를 보면 이들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 특별한 스토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고 특별한 일인 것도 분명하다.
오늘도 나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뜨개의 과정을 생각한다.
지루한 메리야스 뜨기를 반복하면서 내 아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의 시간이 하나둘 쌓여 머지않아 작품이 될 아이의 미래를 즐거운 마음으로 그려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