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기 Sep 26. 2024

달고나에 프렌치 키스를 해 줘요.

달고나에서 인생을 배운다.

 2021년도로 기억한다. Korea란 나라엔 비단 K-pop만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전 세계인들을 열광이 끓어오르는 욕조 으로 풍덩 빠트려 버린, 한 편의 K-drama가 등장했다. 이른바 K-culture의 랜드마크에 당당히 입성한 드라마가 출현한 것이다. 그 작품은 TV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에미상(74회)에서 감독상, 남우 주연상을 비롯하여 무려 6개 부분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이라는 OTT드라마다.


  당시 난 OTT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보니 바쁜 직장일과 고된 육아로 인해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해도 본전 뽑기가 힘들 것 같다는 결괏값이 나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을 안 본 대가는 잔인한 스포로 돌아왔다. 직장에 출근하면 동료들은 고맙게도 <오징어 게임> 속 장면들을 밀가루 반죽하듯 모으고 뭉쳐 거대한 스포 덩어리를 만들어 내 귓가에 꽂아 댔. 내 의도와 상관없이 스포를 당한 바람에 분명 드라마를 안 봤지만 어찌 보면 본 것도 같은 어중간한 느낌만이 남았다. OTT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해겠다는 한 줄기 희미한 빛도 점차 산등성이를 타고 꺼져가는 저녁 태양빛처럼 스러져 버렸다.


 내 삶엔 징크스란 이름의 저주 한 마리가 떡 하니  똬리를 틀고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야구장 직관을 갈 때마다 우리 팀이 자주 패배하는 공식이.(올해 야구장 직관을 거의 안 간 덕에 2024년 페넌트레이스에서 기아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다. 웃픈 현실이다.) 내가 시청하지 않은 <오징어 게임>은 세계 곳곳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아드레날린을 선사하면서 폭발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억지스러운 논리지만 내가 안 본 덕에 <오징어 게임>은 흥행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제작사 측은 나에게 소정의 선물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개인적으로 이정재 배우가 입었던 싸구려 트레이닝복이 탐나던데... 아니면 456억 원어치 '소품용' 지폐뭉치라도... 기분이라도 좋아지게...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온라인 동영상 공유 플랫폼(직역하면 '당신의 텔레비전')이 추천한 알고리즘 영상을 따라가다가 <오징어 게임> 회차별 하이라이트 영상을 접했다. 요즘은 워낙에 영상 편집하는 기술이 좋아져서 하이라이트 영상만 봐도 드라마의 기본 줄기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고, 인상적인 장면만 추려놓았을 터라 본편보다 더 재밌성싶었다. K-편집의 힘을 믿고 하이라이트 영상을 시청했다. 드라마 안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추억의 게임들이 피 비린내 나는 잔혹한 색감의 옷을 갖춰 입고 등장했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다음으로 진행되었던 '설탕 뽑기 게임'이었다.


 코리안 트레디셔널 롤링팝인 달고나. 요즘은 축제 같은 행사장엘 찾아가야 추억의 간식 코너에서 나이가 지긋한 분께서 만드시는 달고나를 운 좋게 구경할 수 있지만, 내가 코 흘리던 시절만 하더라도 유동인구가 꽤 있는 등하굣길의 적당한 터에 달고나 장수가 자리를 깔고 앉아 설탕 녹이는 냄새로 거리 곳곳을 달콤한 공기로 채웠다. 달고나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침 흘리는 동심, 달고나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달고나에 박힌 모양틀을 정성스럽떼내고 있는 동심, 모양틀을 삐뚤빼뚤하게 떼내어놓고 달고나 장수에게 달고나 하나를 더 달라고 우기는 동심 등 달고나는 동심의 설탕가루를 뿌린 추억의 먹거리였다.

축제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본 달고나

  다시 <오징어 게임> 이야기로 돌아와, 드라마 속 설탕 뽑기 게임은 동심과 전혀 관련 없는, 피에 목마른 악마가 창조한 듯한 지옥의 서바이벌이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연신 울려 대고 이곳저곳에 탈락자들의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등장인물들은 최종 우승 상금인 456억은 둘째 치고, 각기 당장의 생의 끈을 붙잡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고작 1000원어치도 안 되는 달고나에 쏟아붓고 있었다. 주인공은 동료의 배신으로 최고 난도인 우산 모양틀이 박혀 있는 달고나를 지급받아 바늘에 마른침을 힘겹게 묻혀 가며 달고나에 박힌 모양틀의 선을 따라 애처롭게 긁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시간 내에 우산 모양틀을 떼내기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제한 시간이 끝나는 순간 주인공의 머리에 겨눠진 총부리에선 매정한 총탄이 발사될 것이다.


 발견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장난기가 많은지  개연성 있게 찾아오지는 않나 보다. 주인공의 얼굴에서 떨어진 운명의 땀방울이 달고나에 닿아 달고나를 녹이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살 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달고나의 앞면과 바늘이란 도구를 과감히 포기하고 입 안에서 자신의 세치 혀를 꺼내 달고나 뒷면에 요염하게 프렌치 키스를 해대며 달고나를 녹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한 시간 내에 가장 난도가 높았던 우산 모양틀을 달고나로부터 분리하는 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했다. 찰나의 사고 전환이 주인공을 극적으로 살린 것이다.


 혹시 낯선 길을 걷다가 길을 잃어 본 적이 있으신지. 길을 잘못 든 거 같다는 미묘한 확신이 찾아왔음에도 이해하기 힘든 고집스러움에게 설득당해 우직하게 쭉 걸어갔다가 뒤늦게나마 먼 길을 되돌아온 적은 없으신지. 애초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고 여겨지면 고집을 믿고 밀고 나가기보단 서둘러 딴 길을 찾아가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학창 시절에 내가 수학을 못 했던 이유는 나만의 단편적인 해결책에만 골몰하며 다른 활로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사고가 뻣뻣했고 융통성은 부족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린다. 내가 선택한 길이 운 좋게 정답일 수도 있을 테지만 발을 들여놓은 그 길에 대한 의구심과 불확실함이 점점 마음 안에서 전염되기 시작한다면 재빨리 발길을 돌릴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찌 보면 제일 빠른 것이다.


 깨달음이란 녀석은 아마도 까꿍 놀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녀석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칠 때는 그리도 안 보이더니 어느새 내 등뒤로 접근하여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방심한 순간에 화들짝 놀라게 한다. 당장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집이나 차가 아니라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다. 갖은 방법을 써봐도 주어진 시간 내에 달고나 앞면에 박힌 모양틀을 떼낼 수 없다면 과감히 달고나 뒷면에다 찐하게 프렌치 키스를 하자.


 사고의 전환이 달고나 하나를 더 얻을 수 있는 행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달고나 하나 대신 귀중한 목숨을 얻었지만.


스테인리스 텀블러에 커피가 아닌 떡볶이를 담아 본 적 있나요? 떡볶이의 온기가 꽤 오래 지속된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