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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Sep 19. 2024

아빠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형아소리에 인생을 배운다.

 어느 평일의 평범한 퇴근길, 엉덩이 냄새를 연상시키는 상호무인문구점에 잠시 들렀다. 딱히  물건이 필요했던 건 아니지만 지난밤 아들들의 명령조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요즘엔 집에 올 때 왜 장난감 안 사와?"

"아빠가 돈이 어딨냐?"

"아빠 돈 없어?"

"응, 아빠 돈 없어."

"아빠, 거지래요. 거지래요."


 시금치를 좋아해서 체내에 철분이 가득할 텐데 아직도 철이 덜 든 둘째 녀석이 돈 없는 아빠를 조롱했다. 돈이 없다는 건 지갑이 비었다는 말이 아니라 집에 장난감이 넘쳐났기에 단지 장난감을 사줄 의향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그나마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준 덕분인지 말의 힘을 일찍 체득하여 아빠를 놀리는 둘째를 점잖게 나무랐다. 그리고 둘째는 노선을 변경했다.


"아빠, 거지라고 놀리지 마. 너도 거지된다. 아빠, 우리가 돈 줄게."

"그럼 돈 줄 테니까 내일 집에 오면서 장난감 사와."


 아빠의 형편없는 경제력 실망한 아들들은 평소 본인들의 지갑으로 고 있는 병아리빛 크로스백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가방 안에서 코가 묻어 엉켜 있는 돈을 바닥에다 몽땅 쏟아내더니 구깃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여섯 장과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퇴근길에 장난감도 안 사 오는 매정한 아빠의 차가운 손바닥 위로 따뜻하게 건넸다. 한 달 용돈이 오천 원인 녀석들에겐 꽤나 큰 금액이었을 텐데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어른들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도 없는 형편이니 그들에게 있어 실물 화폐는 부루마블 화폐나 마찬가지였을 터.


"어디 보자. 다 합치니 칠천오백 원이네."

"내일 칠천오백 원짜리 장난감 사 와야 돼. 알았지?"

"그래, 내일 아빠가 사 올게."


 그리 해서 엉덩이 냄새를 연상시키는 간판의 무인문구점에 들어간 것이다. 다행인지 몰라도 매장 안에서 엉덩이 냄새는 나지 않았다. 칠천오백 원이란 금액에 딱 맞춰서 장난감 두 개를 사기엔 골머리를 앓을 것 같았고, 받았던 돈보다 적은 금액의 장난감을 사서 금액에 딱 맞춰 사 왔다는 거짓말을 쳐서 차익을 남겼다간 가뜩이나 큰 코가 더 커져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결국  지갑에서 이천오백 원을 더 얹어 오천 원짜리 사탕 뽑기 장난감 두 개를 구매하여 출퇴근용 백팩에 집어넣고 아이들이 신나 할 모습을 그리박력 있게 지퍼를 닫았다


 무인문구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엔 화단 사이의 길을 터서 산책 코스를 연상케 하는 100미터가량의 좁은 오름길이 하나 있다. 오름길의 초입에 들어서니 저 에선 아버지와 어린 아들 둘이 횡대 대형으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키를 바탕으로 나이를 어림짐작해 보니 우리 집 애들이얼추 비슷해 보였다. 아빠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서 아장아장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다정하지만 느릿하게 걸어가는 부자를 내가 곧 따라잡을 것 같은데 워낙 길폭이 좁아 그들을 앞지를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3차선 도로로 비유하자면 거북이운전을 하는 차량 세 대가 추월차로와 주행차로를 나란히 점거하고 있는 격이랄까. 비켜달라고 클락션을 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들 뒤에서 슬금슬금 따라가는 것도 유괴범 같아 보였기에 기어이 아이 옆의 좁은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거북이 부자를 추월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이가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성질 급한 아저씨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었나 보다. 등뒤에선 아버지가 아들을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가 내 귀에 날아와 달콤하게 꽂혔다.


"형아가 바빠서 먼저 간 거야."


 형아...?

 삼촌이 아니라 형아...?

 아저씨가 아니라 형아....?

 유괴범이 아니라 형아.....?


 내가 아는 '형아'란 단어는 '형'의 방언이거나 보통 어린 사람이 '형'을 친숙하게 부를 때 쓰는 호칭인데... 어렸을 적 사촌 동생들로부터 형아 소리를 몇 번 들어본 이후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호칭인 '형아'와 몇십 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했다.


 나이를 위장하기 위해 평상시 출퇴근룩이 캐주얼한 편이고 젊은이들이 차고 다닌다는 백팩을 등에 짊어졌다 치더라도 초등학생의 형아가 된 호사를 누리다니.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다짜고짜 번호를 따였을 때 느낌이 이런 걸까.  아마 아이들의 아버지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성질 급한 인간의 차림새가 젊어 보이다 보니 형아라는 단어를 썼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내가 그 아이의 형아가 될 순 없겠지만, 아이들의 아버지가 쏘아 올린 형아라는 몽글몽글한 비눗방울은 나에게 포근하게 닿더니 기분 좋은 뭉클함으로 스러졌다. 언어가 가진 힘이란 이런 걸까. 아니면 내가 진짜 동안이라서 대학생으로 착각한 건... 그래... 아니겠지... 아무리 손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지만 선은 넘지 말자..


 긍정의 언어보다 부정의 언어가 사람들의 고운 입을 더럽히있는 시대이다. 죽겠다, 죽겠다 싶으면 정말 죽을 수 있고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하면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게 언어의 힘이다.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누군가에게 젊음을 주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자로 혹은 미남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한 줌의 언어가 행복을, 자신감을, 자존감을 빚는다. 긍정의 언어는 돈 안 들이고 건넬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선물이 아닐까.


"오늘따라 턱선이 날렵해 보이네? 요즘 다이어트 해?"

"정말 동안이시네요."

"우리 아들은 못하는 게 없네. 잘했어."

"난 널 믿어. 충분히 할 수 있어."

"나중에 넌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형아소리를 들은 오늘의 나는 더 이상 마흔다섯 살의 아재가 아니다. 왠지 소설 속 벤자민 버튼이 된 듯한 기분이다. 돈 없는 아빠지만 젊음을 얻은 하루. 오늘 난 비싼 선물을 받았다. 


말은 랜덤박스가 아니라 블랙박스랍니다. 내가 쏟아낸 말들은 상대방의 메모리에 고스란히 저장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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