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만남을 원한다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나름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서 사람 행세는 하고 있기에 '사람'의 의미를 깊이 있게파고들기엔 에너지 낭비일 것 같고, 그렇다고 좋은 사람은 또 아니어서 '좋은'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도 어려울 듯하다. '좋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심성이 좋은 사람', '체격이 좋은 사람' 등 덧붙여 주는 말이 있으면 '좋은'의 범주가 좁혀질 것 같기도 한데... 어찌 보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가벼운 통념은 너무 철학적인 말일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아가톤이 베푼 향연(Symposion)에 초대받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잔칫집으로 향하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아리스토데모스를 발견한 후 '좋은 사람이 베푼 잔치에는 초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좋은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초대받지 않은 그에게도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이 장면에서 언급된 좋은 사람이란 철학을 사랑하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 즉 철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도 과연 이 뜻이 통용될까? 만약 통용된다면 철학과 교수님들은 다 좋은 사람이란뜻...? 죄송합니다. 사람 행세만 하고 있는 터라.
이렇듯 좋은 사람의 의미는 시대적 트렌드나 지역별 문화적 전통에 따라 의미가 다채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돈 좀 꿔달라는 그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잠수를 탄 죽마고우와, 급전을 친절하게 빌려 준 고리대금업자 중 그는 누구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이슬은 풀잎을 만나 빛나고 바람은 갈대를 만나 소리를 낸다. 헬렌 켈러의 선생님이었던 설리번처럼, 인도 영화 <블랙>에서 미셸의 선생님이었던 사하이처럼 내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주와 세계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듯, 인간도 사회적 동물로서 관계라는 굴레로매여 있듯, 유기적인 관계의 역학 속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해 주는 사람, 나란 존재를 세상의 무대 위로 끄집어 올려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소견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동안 만나오던 지인들과의 교류를 점차 줄여나가는 중이다. 만나 봤자 세상을 향한 비탄, 삶과 인간에 대한 혐오, 누군가를 향한 가치 절하성 발언을 농담처럼 쏟아내는 사람들을 내가 굳이 황금과 같은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까지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터질 듯 말풍선을 부풀리면서 감언이설로 나를 유혹하는 사람들만 만나거나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슬을 머금어 이슬의 영롱함을 더해주는 풀잎, 바람이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속삭이듯 알려주는 갈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방에 처박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말 안 듣는 아들들을 혼내고 있는 아내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따갑게 때린다. 방에 죽치고 앉아서 글이나 쓰지 말고 재빨리 튀어나와 애들 좀 돌보라는 협박성 간접 화법같이들린다. 곧 있으면 집안일 좀 할 테니 애들하고 놀아달라며 노골적으로 남편 찬스를 쓸 기세다. 일단은 버티자. 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만큼은 날 존중해 주는 아내는, 분명 나에게 있어 좋은 사람임은 확실하다. 누구보다 나란 존재 가치에 대해서 인정해 주고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는 좋은 사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좋은 사람이 분출하는 뜨거운 불똥만은 피하고 싶다. 조용히 이어폰을 끼면서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나는, 과연 아내에게 좋은 사람일까.
결국엔 죄책감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해(나도 어쩔 수 없는 INFJ인가 보다)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거실로 나갔다. 아들들과 한데 섞여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며 슈퍼 히어로 놀이(아빠는 타노스가 되어 아들 영웅들을 잡으러 다닌다)를 시작했다.아내는 그제야 안도의한숨을 내쉬며 밀린 집안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빠 타노스를 무찌르면서 슈퍼 히어로가 된 아들들의 활력을 보니 나도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에 가까워지고 있는것일까.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super hero)도 근사하지만, 나는 아들들이 은하계에 강렬한 빛을 뿌리고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 데 단초가 되는 슈퍼노바(supernova) 같은 존재로 커 나갔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겠지만.
그건 그렇고 자꾸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좌뇌와 우뇌를 맴돌면서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큰일이다.몸도 근질거리는데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