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루키 씨와 듀엣으로 My Way를 부르고 싶다.

하루키 씨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by 이현기

토요일 오전은 알차게 분주하다. 네 시 이십 분에 깨어나 아내와 새벽 기도를 가고(뭐, 매일 가긴 하지만) 집에 돌아와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아내와 아들들을 먹일 특제 간장계란밥을 후다닥 만든다. 가족 식사가 끝나고 나면 행동이 느릿한 큰애를 허겁지겁 준비시켜 차로 이십 분 거리인 토요 바이올린 교실로 데려다 준다. 레슨 시간이 세 시간이지만 곧장 집으로 오지 않는다. 레슨이 끝날 때까지 인근을 배회하다가 레슨을 마치고 나오는 큰애를 픽업해서 집으로 데려오는 게 토요일 오전 시간을 소비하는 패턴이 되어 버렸다. 남들은 주말 아침부터 늦잠도 못 자고 고생한다며 동정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늦잠과 맞바꾼 3시간의 해방감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그저 감사하다. 부정적일 수도 있는 상황을 긍정적인 계기로 전환시킨 나의 성숙함에 만세. 혹여 부지런한 남편이 주말 동안 게을러질까 봐 아침 식사 당번과 큰애 픽업 노동을 맡긴 아내에게도 만만세.


바이올린 교실이 열리는 초등학교에서 도보로 10분쯤 걸어가면 알라딘 중고 서점이 나온다. 소개팅 장소에 입장하듯 서점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꽤 규모가 큰 공간에 책들이 수북이 꽂혀 있는 황홀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내 책들도 아닌데 괜히 내 책 같은 풍요로운 착각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유아 서적과 요리 서적 코너를 가볍게 건너뛰고 서점의 가장 끝자락을 향해 내달으면 나의 관심 분야인 인문, 고전, 철학, 소설 코너가 맞닿아 있는 공간이 꿈처럼 등장한다. 서점 주인은 아마 나의 독서 취향을 미리 알아내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들을 그렇게 모아 게 아닐까? 물론 착각은 자유다.


미리 구매할 책을 정해 놓고 가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계획 없이 가서 즉흥적으로 책을 구매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왠지 이름 모를 야산의 하천의 흙탕물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기분이랄까. 중고 서점이다 보니 책보관 상태에 따라 상이할 순 있어도 대략 40% 정도 할인된 가격으로 책들을 판매하고 있다. 새책이든 헌책이든 어차피 인쇄된 글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니 새책 한 권 살 돈이면 헌책 두 권을 사는 게 아내에게 한 달 용돈을 타서 쓰는 직장인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애장 하고 싶은 책은 새책으로 산다.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분들께서 이 글을 읽는다면 부디 오해 없으시길.)


여러 책들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쯤은 그냥 가볍게 흘러가 있다. 살려고 빼놨던 책도 더 좋은 책을 발견하면 다시 원래 자리에 끼어 넣고 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서점 죽돌이는 슬슬 사장님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는 타이밍에 최종적으로 손에 들려 있던 책 두 권을 사기로 결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소설 <일인칭 단수>와 에세이집인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였다. 서점을 나와 평소처럼 인근 스타벅스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를 주문한 뒤 무슨 책을 먼저 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사실 하루키 작가의 작품 경향과 문체를 팬심 가득 동경하지만 절대 나 따위 것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라고 느껴왔던 터였다. 그분이 쌓아 온 인문철학예술적 소양과 비범하고도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높이 뛰기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 높이만큼 걸려 있는 바(bar)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도저히 넘을 수도, 넘볼 수도 없는 그 높이와 경지를 하루키 작가는 능수능란하게 넘고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품고 있었다.


에세이집인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먼저 읽기로 했다. 첫머리에 소개된 작가의 말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은 '어? 그냥 평범한 아저씬데?'였다. 수록된 에세이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물론 에세이 속에도 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키 특유의 예술적 소양, 세계의 각종 토픽에 대한 지식, 여행지에서의 견문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 이 아저씨 재밌는 아저씨네?'라는 친숙함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사소한 일상을 관조하고 통찰하면서도 그 안엔 장난스러운 여유가 재미지게 녹아 있었다. 한 예로 '불테리어밖에 본 적 없다'라는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여성은 화내고 싶은 이 있어서 화내는 게 아니라, 화내고 싶을 가 있어서 화낸다'

소름이 쫙 돋았다. 하루키는 내 아내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지? 똑같은 상황이었음에도 어느 때는 온화했다가 또 어느 때는 불같이 화를 내는 아내의 변덕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하루키 씨는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혹은 내가 여성의 심리에 무딘 것일 수도...) 아무튼 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다 보니까 맘 속에 몇 가지 확신이 찾아왔다. 나나 하루키 씨나 살아온 세월의 색채와 무게는 다르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보통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성실한 남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 일상의 순간에서 무언가를 날카롭게 캐치하여 때론 무겁게 때론 위트 있게 글을 써나가고 있다는 점. 하루키 씨의 글쓰기 방식이 있듯 나의 글쓰기 방식도 분명 있을 거라는 점. 글쓰기를 운명이라고 여기고 있는 점. 모양만 다를 뿐 각자의 컵에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


그렇다고 내가 하루키 씨를 만만히 봐서 그에게 대권 도전을 해보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레벨이 다르다.(난 왜 이 순간 영화 '마녀'에서 김다미 배우의 서슬 퍼런 대사가 떠오르는 거지?) 하지만 그의 글들은 '뭐라도 일단 써보는 게 어때' 라며 내 어깨를 다독이는 듯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펜싱 종목 결승전에서 대한민국의 박상영 선수가 "할 수 있다."를 되뇌며 불리한 판세를 극적으로 뒤집고 금메달을 차지했듯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전 의식을 얻은 것만 같다. 하루키 씨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사랑하고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하루키 씨가 이 글을 볼 일은 1000000% 없겠지만 혹시나 보게 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난 언제쯤 <노르웨이의 숲> 같은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는 잘 부를 수 있는데......


노래방 가고 싶다. 언제 가봤더라.


"And did it my~~~~~~way"


일회용 종이컵에 물을 담으면 금방 눅눅해져 흐물거리지만 투명한 유리컵은 어느 색깔의 액체를 담든 더욱 영롱한 빛을 더해주지요. 어느 컵에 인생을 담아 보시겠습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