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이밍이다. 아내가 변심하기 전에 덥석 미끼를 물어야 했다. 살인적인 더위와 아들 녀석들의 컨디션 문제로 인해 이번 방학은 할 수 없이 가족 여행 계획을 단념했었는데 아내는 못내 여행 좋아하는 남편이 맘에 걸렸었나 보다. 아내가 던진 미끼를 물긴 했지만 가족을 놔두고 나 혼자만 여행을 간다는 것도 사실 맘에 걸렸기에 여행 계획을 따로 짜놓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아내가 한번 더 되물어왔기에 부랴부랴 가까운 전주라도다녀오기로 맘먹었다.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전주 갈 만한 곳'을 뒤지지 않고 무작정 전주를떠올려 보니 의식의 물결은 전동성당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간단히 짐을 꾸린 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전동성당을 검색한 후 액셀을 밟았다. 막무가내로 출발한 여행이었지만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선 이후 나름 그럴싸한 전주여행 계획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그리기 시작했다.
1단계 : 전주를 방문한 기념으로 전동성당에서 숙제하듯 인증사진 찍기
2단계 : 한옥마을로차를 돌려 한옥의운치를 느끼며 마실한 바퀴 돌기
3단계 : 다시 차를 몰아 최명희 문학관을 방문하여 소설 <혼불>에 담긴 우리말 정신 내면화하기
드디어 백 여킬로미터를 달려 전동성당 부근에 도착했다. 아무리 막무가내 자유여행이 콘셉트이었지만 성당 근처에 당도한 순간 내 무지함에게묵직한 카운터펀치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전동성당 맞은편에 버젓이 한옥마을이 위치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이는 없었지만 어쨌든운이 좋은 상황 같기도 하여 쓴웃음을 지었다. 관광 명소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전동성당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노상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다시 전동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획대로 사진 몇 장을 수행평가하듯 후다닥 찍고 나서 차를 돌릴 필요도 없이 발길의방향만 돌려 한옥마을로향했다. 길 건너편에 있는 경기전에 들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기록적인 폭염과 매표소앞에 기다랗게 늘어선 인파는 경기전 입장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과감히 경기전을 포기하고 한옥마을 마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5분쯤 걸었나? 이건 마실이 아니라 마실 것을 찾아 삼만리가되어버렸다. 덥고 습한 날씨는 마치 두꺼운 겨울파카를껴입고 습식 사우나에 입장하는 것마냥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불어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가족, 연인, 친구 단위로무리 짓고 다니니 혼자 여행 온 나에겐 낯선 소외감마저엄습했다. 흡사 태양빛이 강렬한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이방인의 행색이랄까.
설상가상으로 다리마저부들부들떨려오길래 절반도 안 둘러본 한옥마을에서 작전상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조금만 더 걸었다간 타지의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인간 타다끼가 될 것만 같았다. 폭염을뚫고 다시 주차장을 향해 1킬로미터쯤 행군하듯 걸으니 습하고 더운 날씨는 어느새 나 몰래 땀 미스트를 온몸에 흠뻑 뿌려 놓았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땀을 식힌 뒤 내비게이션에그럴싸한 전주여행 계획의 마지막 코스인 최명희 문학관을 검색했다.
어?
내비게이션 화면 속 최명희 문학관은 얄밉게도 방금 겨우 탈출한 한옥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나에겐 다시 한옥마을로 돌아갈 전의가 에어컨 바람에땀 식듯 모두 증발한 상태였다.
참 묘한 가르침을 주는 여행이었다. 전동성당을 찾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침 한옥마을이가까이에 붙어 있는 행운이 따랐지만, 쉽게 찾아간듯한 한옥마을을 대충 둘러보는 바람에 최명희 문학관을놓치는 불행이 찾아왔다. 사소한 듯 보이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가끔 예기치 않는 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저절로 굴러 들어온 운이라고 그 순간을 가볍게 치부해 버린다거나 대충 지나쳐 버리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것을 실감했다. 정보 수집 없이 막무가내로 떠난 자유여행이 낳은 참사이지만 어디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만 된다던가. 운이란 것도 준비된 자에게는 행운이 될 수 있지만 준비가 안된 자에게는 불행으로다가올 수 있다.
무더운 여름 여행에서 힘겹게 발견한 삶의 작은 가르침을 인생 행장에 깊숙이챙겨 넣고 숙소를 향해힘없이차를 몰았다.
삶이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간으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아. 그 시간을 무심코 흘려보내기만 한다면 네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도 무심코 지나쳐 버릴지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