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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14. 2024

수능과 모의고사에 나오는 수사법들의 엉뚱한 사색대회

직유, 은유, 의인, 반어, 역설, 대구의 미학

"선생님, 수업 너무 잠 와요. 첫사랑 얘기나 해주세요."


 점심시간 후 5교시 문학 수업시간, INFJ 국어선생님의 따분한 강의에 학생들은 당당하게 수업거부권을 행사하며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쳤다. 졸기만 해도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혹은 교단으로 불려 나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란 질문의 답변에 따라 매의 강도가 달라졌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교육은 진정 학생을 위한 서비스업이라는 걸 여실히 느끼는 중이다. 스타 강사급으로 수업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않은 이상, 남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야한 이야기로 농밀한 환심을 사지 않은 이상 학생들은 교사에게 서비스 다운 서비스를 줄곧 요구했다.


"정신 나간 것들아.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책을 보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잠은 무덤 가서들 자라."

출처 : 픽사베이

 휴머니즘을 과감히 버리고 참으로 진부하고도 꼰대 같은 멘트로 학생들의 결사 항전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실은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힘들어할 때마다 가끔씩 사랑, 연애, 군대, 게임 이야기 등을 해주며 잠시 환심을 사 본 적도 있었지만, 오직 그때뿐이었다. 학생들은 수업 외적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어김없이 병든 병아리처럼 고개를 꾸벅거리다 결국 스스로 활력 버튼을 꺼버렸다. 수능을 앞둔 녀석들에게선 절실함이 별로 없어 보였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사무용 의자에 털썩 몸을 내던졌다. 다음 시간은 공강이었지만 쉴 여력이 없었다. 밀린 행정업무를 처리하거나 방과 후 수업을 위한 교재 연구가 남아 있었다. 교사의 하루는 참으로 바쁘게 돌아간다는 생각마저 사치였다. 지친 육신을 간신히 설득한 후 맥없이 문학 교재를 펼치니 모의고사 기출문제들이 반갑게 날 맞이해 주었다. (가)와 (나) 작품에는 다양한 수사법들이 많이도 활용되고 있었다. 직유, 은유, 의인, 반어, 역설, 대구.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수사법은 문학의 향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 위대한 공로가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오로지 수능 국어 고득점을 위해 수사법을 영어 단어처럼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지나 않을까? 마치 수능 시험 때만 쓰고 버릴 것처럼.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은 큰맘 먹고 '제1회 수사법들의 엉뚱한 사색 대회'를 개최해 보기로 했다. 기출문제 속 수사법들에게 대회 참가 의향을 물어보니 고맙게도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반어법, 역설법, 대구법 이상 6개의 수사법 모두가 참가 신청서를 제출해 주었다.

출처 : 픽사베이

  개회를 선포하자마자 문제가 터졌다. 역설법이 참가 신청서를 넣었다가 '참가하고 싶지만 참가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참 사유를 역설적으로 날리며 갑작스럽게 대회 참가를 철회했다. 표면적으로 말이 안 되는 표현법이 곧 역설법이니까 역설법은 자신의 본질에 맞게 이름값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인적으로 역설법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수사법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불참 통보는 아쉽게만 느껴졌다.


 나는 오늘 사색 대회의 사회자가 되어 각각의 수사법에게 각기 다른 시제를 부여하기로 했다. 대회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걸었지만 사실 경쟁보다는 오랜만에 친목 도모가 주된 목적이었다. 그들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 어마어마한 시적 효과가 발생하는, 멀지만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듯한 대구법이 먼저 과감하게 나섰다.


"어서 시제를 밝히시오. 빨리 주제를 던지시오."


 대구법은 일상 언어마저 대구법을 활용하는 노련함을 발휘했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시제를 툭 건넸다.


"그대의 시제는 바로 운명이오."

"음, 운명이라. 잠시만 기다리시오."


 생각을 정리한 대구법은 준비된 백지 위에 운명이란 주제의 단문을 규율에 맞춰 끄적거리더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작품을 제출했다.



<대구법의 사색>


따뜻한 감정은 되도록 오랫동안,

차가운 감정은 되도록 잠시동안,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다가오는 만남의 역설.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찾아오는 이별의 역설.


운명은 늘 장난처럼 우리의 인생을 간지럽힌다.

운명은 늘 칼날처럼 우리의 인연을 갈라놓는다.


운명은 늘,

운명은 늘,


우리를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봉제하여 삶의 인형극 무대 위에서 운명의 손놀림 대로 춤추게 한다.

우리는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봉제되어 삶의 인형극 무대 위에서 운명이 이끄는 대로 춤추고 있다.


가혹한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선 꿈이 필요하다.

찬란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선 도전이 필요하다.

익숙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대구법을 빌린 작가 창작시


"어떻소? 내 작품이."

"짧은 시간 내에 만든 것치곤 운명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참으로 인상 깊었소. 특히 1연의 감정에 대한 사유와 마지막 연의 극복 의지가 크게 와닿구려."


따뜻한 감정은 되도록 오랫동안, 차가운 감정은 되도록 잠시동안

가혹한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선 꿈이 필요하다. 찬란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선 도전이 필요하다. 익숙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출처 : 픽사베이

 다음으로 나선 참가자는 아까부터 수줍은 기색을 새색시처럼 머금고 있는 은유법이었다.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사랑이란 시제가 떠올랐다.


"시제를 부여하겠소. 시제는 사랑이오."

"아, 이루 말할 수 없는 뜨거움이 오늘의 시제이군요."

"방금 사랑을 은유적으로 뜨거움에 비유한 것이오? 역시 은유법답소."


 생각을 정리한 은유법은 준비된 백지 위에 사랑이란 주제의 단문을 조심조심 끄적거리더니 남들이 눈에 띄지 않게 작품을 제출했다.



<은유법의 사색>


사랑은 햇빛이다.

사람들에게 내리쬐는 사랑은 추웠던 삶 속의 따스한 옷이 되어준다.

사랑은 용광로이다.

불쾌한 감정이 불청객처럼 찾아와 의식을 어지럽히더라도 사랑이라면 통쾌하게 녹일 수 있다.

사랑은 여행 전날 밤이다.

설레는 마음과 다정히 마주 보며 눈부신 내일을 그린다.

사랑은 마음의 살을 찌우는 설탕이다.

중독적이고 강렬한 달콤함이 있다. 사랑의 비만자가 되어라. 마음이 살찐다는 것은 결국 헤세드(Chesed)한 삶을 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정신이 혼미해지더라도 계속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녹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사랑의 온도는 사막의 온도보다 뜨겁다.


                                                         -은유법을 빌린 작가 창작시


"실력은 부족하지만 생각나는 만큼 끄적여 봤습니다."

"오, 아주 훌륭하오. 사랑의 온도를 높인다는 표현은 심히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정신이 혼미해지더라도 계속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녹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의 온도를 높여라. 사랑의 온도는 사막의 온도보다 뜨겁다.

 

출처 : 픽사베이

 다음으로 나선 참가자는 반어법이었다. 평소 장난스러움이 얼굴에 묻어 있는 반어법에게 문득 반어적으로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대는 이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소. 썩 나가시오."

"난 나갈 마음이 없소."


 나갈 마음이 없다고 해놓고서 반어법은 자기의 본성에 충실하게 대회장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사실 어떤 시제를 던져주어도 반어적으로 장난스럽게 표현할 것이 뻔했기에 오히려 잘됐는 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그 모난 성격 좀 고쳐서 왔으면.


 큰일이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음을 깜빡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직유법과 의인법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에게 동시에 같은 시제를 던졌다. 시제는 '꿈'이었다. 직유법은 대인배처럼 이해해 주었고, 의인법도 호탕하게 괜찮다는 손사래를 좌우로 쳐댔다. 먼저 글을 제출한 건 직유법이었다.



<직유법의 사색>


인생은 꿈처럼 황홀하다는 걸 지옥을 다녀와보니 알게 되었다.

삶을 지옥처럼 여기고 살아왔던 건 결국 나의 병들고 나약한 인지 구조 때문이었다.

인지 구조의 시급한 개혁이 필요하다.

거지마냥 비굴하게 살 필요가 없었다.

KO패를 당한 패배자처럼 인생의 스파링 위에서 처참하게 계속 쓰러져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장인의 숨결 같이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삶의 모든 긴장과 불안의 근육을 이완시켜라.

성악가의 성량 같이 복식 호흡을 천천히 내쉬면서 삶의 에너지와  열기를 단전으로 응축시켜라.

비 갠 뒤에 무지개 오듯

절망에 젖은 몸을 기대와 확신으로 말리리라.

드라이플라워마냥

영원히 시들지 않는

염원을 담아


                                                         -직유법을 빌린 작가 창작시


"오, 시들지 않는 꿈을 드라이플라워에 비유한 점이 신선하구려."

"쓰레기 같은 글인데 과찬입니다."


비 갠 뒤에 무지개 오듯, 절망에 젖은 몸을 기대와 확신으로 말리리라. 드라이플라워마냥 영원히 시들지 않는 염원을 담아
출처 : 픽사베이

 마지막은 의인법 차례였다.


<의인법의 사색>


군청색 근심 어린 하늘 아래 우뚝 솟아있는 위태로운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무겁게 내딛는  발걸음마다 좌절한 기색이 역력한 의기소침함이 묻어 있다.

세상의 모든 중력이 내 인생에 냉소를 퍼부으며 어깨를 육중하게 짓누르고 있다.

벼랑 끝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말 텐가.

벼랑 저 너머에서 날 향해 손짓하는 구원의 꽃송이를 꺾고 말 텐가.

중력의 명령에 순응하여 고꾸라지려던  찰나,

꽃송이가 내뿜는 인력의  향기가 자신에게 다가오라며 반가운 손인사를 건넨다.

지독한 비염에 걸렸던 무기력함이 뻥하니 뚫리는 순간이다.

난간 너머 피어 있는 꿈 송이가 이렇게 향기로운 줄을 여태 몰랐다.


                                                         -의인법을 빌린 작가 창작시


"난간에 위태롭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꿈 송이에 비유한 표현이 탁월하구려. 역시 비범하오."

"인간의 삶이란 늘 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절벽에도 꽃은 피어난답니다."


난간 너머 피어 있는 꿈 송이가 이렇게 향기로운 줄을 여태 몰랐다.
출처 : 픽사베이


 이로써 '제1회 수사법들의 엉뚱한 사색 대회'는 나 혼자만의 열렬한 환호를 등에 업고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대회에 참가했던 수사법들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기출문제속으로 들어갔다. 대회를 치러보니 '~처럼, ~같이'는 직유법이고, 'A는 B이다'는 은유법이라고 공산품 찍어내듯 수사법을 가르쳐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는 건 어찌 보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닐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수업을 알리는 시작종이 비장하게 울린다.


 낡은 기계 한 대가 수업을 하러 교실을 향해 삐그덕 삐그덕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계에 코딩된 프로그램은 오랜 시간 동안 업데이트 연기해  구버전이다.

출처 : 픽사베이


상대방이 날 진부하다고 느끼는 건 그동안 날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제목의 의미는 말 그대로 수능과 모의고사에 단골처럼 나오는 수사법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창작한 '수사법들의 사색 대회'가 수능에 나온다는 말은 절대 아니므로 혹시나 제 글을 접한 수험생들의 오해와 착오가 없길 바랍니다. 수능 시험에는 더 수준 높고 완성도 있는 문학 작품이 출제되겠지요. 국어 교사로서 여러분들의 수능 국어 고득점을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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