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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r 31. 2024

Drum Come True

꿈 연작수필 첫 번째 이야기

'Our time is running out~ Our time is running out~'      


 어느 고등학교 축제 공연 현장에서 영국 락밴드 MUSE의 대표곡인 ‘Time is running out’의 후렴구가 성능이 안 좋은 스피커를 뚫고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곡이 고음을 향해 내달릴수록 런닝셔츠인지 민소매 티셔츠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정체불명의 상의를 걸친 리드 보컬의 관자놀이 안에 감춰진 혈관은 마치 정맥류처럼 올록볼록 팽창하고 있었다. 민소매 티셔츠의 음색은 MUSE의 보컬리스트 메튜 벨라미보단 차라리 Radiohead의 보컬리스트 톰 요크에 가까웠다. 민소매 티셔츠는 진성과 가성을 요염하게 섞어가며 성대 춤을 추는 무희처럼 관객들의 혼과 넋을 몰래 훔치고 있었다. 톰 요크의 창법으로 메튜 벨라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민소매 티셔츠의 정체는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고등학교의 현직 영어 교사이다. 음악 좀 한다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축제 공연용 프로젝트 사제밴드를 만든 후 축제 무대에 올릴 공연을 오랜 시간 정성스레 준비한 모양이다.    

 

 사제 통합의 프로젝트 밴드. ‘윤도현 밴드’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축제 팸플릿에 소개된 밴드 이름은 교사 자신의 본명을 건 ‘○○○밴드’였다. 민소매 선생님은 분명 자기애가 강한 분임이 틀림없다. 밴드 이름은 유치 뽕짝이었지만 공연은 나름 수준급이었다. 민소매 선생님은 영어와 음악에 있어선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프로 정신을 갖춘 분이셨다. 한 번의 본공연을 위한 수많은 합주 과정 속에서 과연 민소매 선생님은 학생들을 몇 번이나 엄하게 다그쳤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민소매 선생님이 일렉기타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멋드러지게 연주하며 고음의 POP을 자유자재로 부르는 장면은 나에게 ROCK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음악은 락, 사나이는 기타'라는 나만의 확증 편향이 시작된 계기였다.      


 공연이 끝나고 민소매 선생님을 찾아갔다. 민소매는 좀 도가 지나쳤어요, 라는 말이 너무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민소매 선생님은 아마추어 복서였기 때문이다. 환심을 사기 위해 공연 너무 멋있었다는 말을 아첨하듯 건넸다. 민소매 선생님은 열악한 음향시설을 저주하며 자신의 완벽한 퍼포먼스가 묻힌 것 같아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민소매 티셔츠보단 런닝셔츠에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원만한 대인 관계 유지와 무병장수의 꿈을 위해 다시 한번 꾹 참아야만 했다. 민소매 선생님은 아마추어 복서였다.      


 며칠 후, 런닝셔츠같은 민소매를 벗어 던지고 출근 복장을 단정히 입은 민소매 선생님이 날 찾아왔다. 얼마 전 축제 때 내가 보인 관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은 것이다. 민소매 선생님은 '도를 아십니까'와 같이 부담스러운 어조를 장전하여 함께 음악 할 생각이 없냐고 본격적인 포교 작업을 시작했다. 필요할 때마다 마구 갖다 붙이는 일회용 밴드가 아닌 정식적인 교사 밴드 동아리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도 덧붙이셨다. 가뜩이나 저번 축제 공연을 계기로 기타라는 악기가 주는 폭발적인 카리스마에 흠뻑 빠졌었기에 민소매 선생님의 포교 제안은 어찌 보면 내 삶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대중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자아가 도취되는 것 같다. 암, 사나이는 기타지.     

 

"안 그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좋습니다."


"기타는 무슨, 그냥 드럼 쳐." 


“네, 네?”     


 민소매와 락을 너무 사랑하는 민소매 선생님은 가뜩이나 기타리스트는 학교에 너무 많다고, 본인이 만들 교사 밴드 동아리에는 드럼 세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은 날 벙찌게 만들었지만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싶진 않았다. 며칠 고민해보겠다고 답한 후 일단 포교 현장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드럼보단 기타를 치고 싶은 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내 운명같은 대전제이다. 최대한 차분하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거절의 모범 답안을 찾아야만 한다. 민소매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난 배운 사람이다. 나의 명석하고 합리적인 지성과 이성을 총동원해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내자.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를 오로지 이 상황에 집중시키자. 긴장하지 마라. 난 최고의 타개책을 생각해 낼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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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어느샌가 먼지 냄새나는 지하의 음침한 드럼교습소에 감금된 채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8비트 드럼 박자를 아장아장 서툴게 연습하고 있다. 힙합 듀오 ‘듀스’의 노래 한 구절인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었다. 기타를 치고 싶었던 나의 라이트급 자유 의지는 아마추어 복서 타이틀을 보유한 민소매 선생님의 헤비급 회유에 처참하게 KO패 당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긴 했지만 내 신념이나 행동을 바꾸면 인지조화가 되지 않겠냐고 나름 합리화했다. 어지럽혀진 나의 인지는 자기 계발이란 명분으로 위장하면 된다. 난 '음악은 락, 사나이는 드럼'이라는 새로운 확증 편향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 두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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