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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01. 2024

네 방에서 당장 나가!

내 방은 어디에

 국가가 부도났다.   

  

 I am F(나는 낙제야)사태의 장본인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가장들에게, 가정들에게 자신의 F학점을 고스란히 떠넘겼다. 정부의 낙제점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난제를 남겼다. 지방에서 우체국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명예퇴직을 하셨다. 먹고 살기 위해 어머니는 ‘우리집’을 ‘하숙집’으로 용도 변경하셨다. 집이 공고 근처에 있다보니 주로 공고에 다니는 형들이 우리집, 아니 하숙집에 찾아 들었다. 나와 여동생은 주인에게 미운털 박힌 반려견처럼 각자의 방에서 쫓겨나 거실이나 주방을 떠돌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하숙생 형들이 본가로 돌아가는 방학 동안만 다시 내 방 같지도 않은 내 방을 되찾아 ‘우리집’에서 단기 ‘하숙’ 생활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학교 후문에 있는 하숙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했다. 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두 개 분대 정도의 인원 열너댓 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구막사였다. 군대에서 나의 안락한 방은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칸막이가 쳐져 있는 화장실 속 좌변기가 놓여 있는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다. 제대를 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9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방에 일자리가 없어서 쫓겨가듯 서울로 올라가신 부모님은 일원동 쪽 반지하방을 구해서 살고 계셨다. 방 한 칸, 주방 한 칸이 전부인 반지하주택. 나는 주방용품처럼 주방에 얹혀, 주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을 위한 학비를 차곡차곡 모았다.     


 드디어 복학을 했다. 예비역 복학생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여동생의 8평짜리 원룸에 1+1 제품처럼 얹혀 살았다. 여동생은 밤과 낮이 뒤바뀐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방의 주인은 하루에 두 번 뒤바뀌었다. 교사 지망생이었던 나는 첫해 임용고사에 아쉽게 떨어졌다. 모든 걸 걸었었기에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절망이 찾아왔다. 죽음의 악귀(惡鬼)에 쓰인 듯 삶을 스스로 포기할까 소심한 시도를 해봤지만, 아침에 퇴근하는 여동생이 극적으로 죽음의 악귀로부터 날 빼돌렸다. 겨우 연명한 목숨을 붙잡고 일선 학교에서 육아 대체나 출산 대체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며 퇴근 후 틈틈이 임용고사 준비를 했다. 여동생이 돈을 모아 놓은 게 있어서 10평 남짓한 원룸으로 이사를 갔지만, 나만의 방이란 건 없었고 방의 주인은 여전히 하루에 두 번 바뀌었다.     


 임용고사엔 번번이 낙방했지만 나쁜 짓을 덜 하고 살아옴에 대한 신의 작은 선물인지 지금의 아내를 얻었다. 아내는 나의 환경과 상황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나 자체를 큰 선물이라 여긴, 천사같은 사람이었다. 가진 게 없었기에, 우리는 12평짜리, 차마 아파트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집을 전세로 구해 소박한 신혼 살이를 시작했다.     


 신이 우리를 축복하셨는지 마침내 정식교사가 되었다. 12평짜리 아파트도 전세 계약이 끝나 우리 부부는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내가 일하는 학교 근처의 32평대 아파트를 계약했다. 은행이 빌려준 돈이지만 내 집이 생겼다는 환희는 세상 어떠한 말로도 차마 표현 못 할 만큼, 굳이 표현하자면 뭉클함 이상의 묵직한 무언가였다. 정식으로 입주하기 전, 서류상으로 내 집이 되어 있는 그 휑한 집을 퇴근할 때마다 귀신에 홀린 듯 찾아갔다. 텅 비어 있는 방들과 음침한 거실을 이리저리 누비며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집 안 구석구석에 묻어 놓고 돌아왔다. 달마다 나오는 월급으로 대출 빚을 갚아나가며 은행이 사준 아파트 속 내 지분의 평수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현관문이 내 것이 되었다. 이후 화장실이 내 것이 되었다. 다음으로 거실도 내 것이 되었다. 몇 년만 더 노력한다면 나만의 온전한 방과 집이 생길 것이다.     


 신은 장난꾸러기이심이 틀림없다. 잘 나갈 때 시련을 주시고, 시련 후에는 성공을 주시니 말이다. 아내 몰래 신용대출을 해서 투자한 게 크게 잘못되었다. 해가 갈수록 원금 및 이자 상환을 위해 대출깡을 반복하다 보니 빚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기존 주택담보대출에 이젠 신용대출까지. 아내는 육아에만 전념하는 주부다 보니 외벌이로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빚이 쌓여버렸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파트를 파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같았다. 이제야 나만의 온전한 방이 생기겠다는 기대감은 나의 미련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거운 죄책감이 날 짓눌러서 예전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남겨진 자들이 흘릴 애증과 원망의 눈물은 날 더 극악무도한 전과자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결국 모든 가족에게 나의 실수를 자백하기로 했다. 아내는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장인, 장모님께서도 나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며 같이 길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온 처가 식구들이 진심으로 날 걱정하며 힘을 모아주셨다. 다음으로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가 어떤 말씀을 하시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차가운 비난의 말이든 날카로운 비판의 말이든 삶을 만만히 본 죄인은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상황과 마음에 대한 단죄의 생채기를 내지 않으셨다. 

    

“그까짓 돈, 네가 정신 차리고 살아가다 보면 금방 갚아나갈 수 있다. 기운 내라.”     


 어머니의 한마디가 삶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내 가슴에 포근한 담요처럼 다가왔다. 난 지금까지 내 방이라는 건 없다시피 살아왔다는 피해의식, 열등감이 가득했었다. 나만의 방을, 나만의 집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 삶을 지배해 온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아무리 뻗어 봐도 닿을 수 없는, 공허한 뒷걸음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뱃 속, 그 포근했던 방이 떠올랐다. 술 취한 아버지께선 엄마의 불룩한 배를 만지며 나에게 부끄러운 사랑 고백을 했었다. 어머니께선 보고 싶다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매일 같이 매 순간 반복하셨다. 보일러를 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언제나 따스함이 가득했던 사랑의 방. 난 그 안에서 매일 세상의 빛을 기다리며 희망의 살을 찌우지 않았을까?     


 어려운 일을 겪고 나니 진짜 내 편이 누군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내 편이 아니었고, 네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놀랍게도 내 편으로 다가왔다. 내 편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나란 인간을 사랑해줬던, 사랑해주는, 사랑해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을 평생 다 갚을 수나 있을까?      


 방이란 건 결국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식어버린 내 마음의 방에 조그마한 불씨를 지피기로 했다. 이제부터라도 방이 뜨끈뜨끈해지도록 장작을 모아야겠다. 용기, 위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장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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