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의 기초에 대한 초급반 강의를 어느 정도 수료하고 난 후, 나는 다짜고짜 드럼 선생님께 MUSE의 ‘타임 이즈 러닝 아웃’을 가르쳐달라고 생억지를 부리며 생떼를 썼다. 드럼 선생님은 난이도가 꽤 있는 곡이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수강생이 떨어져 나가는 것보단 울면서 겨자를 드시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는지 다음 날 손수 채보한 드럼 악보지를 건네주었다.
난 그날 이후 악보지의 드럼 라임을 수험생이 영어 단어 외듯 계속 익히고 또 익혔다. 큰맘 먹고 거액을 들여 전자드럼도 서재에 들였다. 퇴근 후에는 습관처럼 드럼 앞으로 달려가서 이어폰을 귀에 끼고 곡의 연주에 맞추어 드럼 패드를 꽝꽝 두드렸다. 영화 위플래시 속 주인공인 앤드류처럼 손에 굳은살이 점점 박혀갔다. 앤드류같이 음악에 미친놈처럼, 드럼에 미친놈처럼, 드럼패드에 웬수를 진 것처럼 광적으로 연습에 집착했다. ‘타임 이즈 러닝 아웃’이란 노래의 제목처럼 마치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되어 그 한 곡만 주야장천 반복했다. 합주가 약속된 날엔 민소매 선생님과 함께 합을 맞춰보기도 했다.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 민소매 선생님은 나한테 별 기대를 안 하신 듯했지만, 직접 합주를 해보니 생각보다 재능이 있다는 칭찬 세례를 거룩하게 퍼부으셨다. 드럼에 재능이 있다는 칭찬까지 받다 보니 내가 치고 있는 악기가 기타가 아니어서 아쉽다는 생각은 진작에 사라져버렸고 드럼 비트가 주는 황홀경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드럼 박자와 함께 시간은 쿵딱쿵딱 흘러 갔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학교 축제가 열렸다. 전설의 ○○○밴드는 리드보컬을 제외한 뉴페이스들을 수혈해서 올해 역시 재결성되었다. 밴드 이름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대중 앞에서 드럼만 연주할 수 있다면 크게 상관할 영역이 아니었다. 세 곡을 연주하기로 했고 피날레곡은 ‘타임 이즈 러닝 아웃’이었다. 가볍게 두 곡을 연주한 후 이제 대망의 ‘타임 이즈 러닝 아웃’ 연주 차례가 다가왔다. 드럼 스틱을 쥐고 있는 양손에 조금씩 땀이 차면서 긴장감이 스몄다. 베이스 기타의 묵직한 멜로디와 함께 곡의 서막을 올렸다. 내 드럼 스틱은 악보의 규율에 맞게 하이헷, 스네어, 탐탐을 가정 방문하듯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기’로 시작한 곡은 ‘승’을 천천히 지나 ‘전’과 ‘결’을 향해 거칠게 올라가고 있었다.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연주 초반의 긴장감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감으로 변성되었다. 이젠 내 앞에서 연주하던 세션들이 사라지고 관객도 보이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조명 빛만이 무대를 게슴츠레하게 밝힐 뿐이었다. 중력이 없는 미지의 우주 공간 속에 나 혼자 정처 없이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그려 놓은 악보지는 진작에 휘발되고 말았다. 그냥 음악에, 드럼에 내 모든 신체와 정신을 얌전히 내주고 말았다. 두 팔과 두 다리는 내 이성의 통제를 따라가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폭발 직전인 감정의 지휘 아래 있었다. 드럼은 베이스기타와 세차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일렉기타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면서 흥분과 환희의 산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드럼의 화려한 필인으로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의 박수로 공연에 화답했다. 벅차올랐던 감정의 농도가 서서히 옅어지면서 이젠 함께 공연한 세션들과 자리를 꽉 채운 관객들의 모습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음악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 일 년이란 시간 동안 뚝심 있게 한 곡만 연습했고,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은 배신이 아닌 신뢰로 답을 해 주었다. 되는구나. 하면 되는구나. 세상에 못 할 일은 없구나. 드럼 연습에 매진했던 일 년이란 시간은 진실로 황홀한 시간 낭비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망설이다 호기를 놓치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뭔가를 하고 싶다면, 뭔가를 해야만 한다면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자. 절대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이란 녀석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삶에 종속시키자. 시간의 노예가 아닌 시간의 주인이 된다면 분명 어느 분야이든 성공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은 충분하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란 괜히 허투루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연주하는 것이다. 근.사.하.게
‘Time is running out!!!!’
(끝)...이 아니라 글로 전하지 못한 뒷이야기
오월창작가요제라는 전국 규모 가요제의 결선 무대까지 올라가 보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민소매 선생님께서 손수 창작하신 곡으로^^ 민소매 사랑은 여전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