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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일기 EP9. 2000만원 짜리 해골물의 황홀함

by 가치관의역전

2022년 4월, 나의 주식계좌에 찍힌 평가손익 2000만원. 그리고 총 평가액 1억.


레버리지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빚을 끌어다 쓴 도박의 한방이었다. 근래의 수익금과 합친다면 직장에서 벌 수 있는 1년 치의 실수령액을 한두달만에 벌었다. 과연 인생에서 그보다 큰 달콤함이 있었을까. 그날 핸드폰으로 평가손익을 마주한 첫 순간, 나는 헬스장 스트레칭존에 있었다. 검정색 나이키 드라이핏 티셔츠, 검정색 쇼츠, 흰색 스니커즈의 복장으로. 거울을 마주보며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서 입만큼은 자유로웠기에 입만 올라간 어색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폼롤러를 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있다면 지금 내가 그곳에 나뒹구고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했고 주변을 둘러보며 '이 헬스장에서 나보다 주식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대로라면 순자산 1억은 금방이다.'하는 근자감도 불타올랐다.


내게도 초사이언을 맴도는 불꽃이 생긴 것인지 무언가 나를 굉장히 뜨겁게 했다. 특히 머릿속에서 처음 느껴보는 황홀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맥박이 빨라지고,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은 게 마약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약의 느낌이 그때의 느낌과 흡사하지 않았었을까 한다.


일상적인 기억은 금세 흐릿해지지만 감정이 동반된 기억은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다. 그날 내가 있었던 곳, 나의 복장, 의식의 흐름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똘똘 뭉친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스트레스 호르몬과 작용하여 기억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감정 기억'이라고 한다.(심리학적 용어로는 '섬광 기억(Flashbulb memory)) 특정한 일이나 사건이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 어떤 감정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황홀감이었다. 내가 마주한 빨간색 숫자의 평가손익은 2,000만원 짜리의 해골물이었고 이를 벌컥벌컥 마신 난 살아생전 느껴보지 못한 황홀감을 느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해골물에 도사린 끔찍함과 비참함을. 그때 맛본 황홀감을 단 한번이라도 다시 느끼기 위해, 정확하게 그 시점부터 주식을 도박화했다. 실현하지 못한 평가손익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이후 주가는 정직하게 우하향하여 그날 주가의 절반 가격에 수익실현을 했다.

그렇게 그날 이후 난 동굴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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