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질문을 잃어버렸을까?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안타까운 침묵

by 등대지기 지니


'질문 있나요? = 수업 끝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 교실은 물론이고 대학 강의실에서도 흔히 만나는 기형적 공식이다. 질문을 권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질문 있나요?'는 지적 호기심을 부르는 신호가 아니라, 수업종료를 알리는 알람일 뿐이다. 왜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없어서라면 다행이지만, 궁금한 것이 있음에도 입을 다물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1. 궁금한 것을 질문으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2. 친구(or 수강생)들의 시선집중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3. '수업 흐름이나 쉬는 시간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행위로 비난받을까 두렵다.
4. 다 아는 내용을 나만 모르고 질문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나' 보다는 '우리'라는 문화가 압도적인 사회라서일까? 남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것이 이유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침묵의 배경에는 보다 근본적이고 암울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넘어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아예 질문하는 법 자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았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 받고 있는, 길고 긴 학교교육은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신 정형화된 동작과 구호, 그리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합창이 붙는 ‘대답하는 법’은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참관수업에 참여해 본 부모라면 아이들의 정돈된 발표 모습을 떠올려보라.


아이들은 학교에서 생각이 필요 없는 교육, 너무 친절해서 스스로 알고 싶은 것이 없는 교육에 익숙해진다. 교과서에 따른 선생님의 단순 지식 전달에서는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으니 질문은 그저 불필요한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질문이 많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에 응해줄 선생님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열악한 교육환경’이라는 추상적인 핑계로 돌리고 순응한다.


학교는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에 대해, 그 정답을 '가장 빠르고 실수 없이 찾아내는 능력'만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정답을 알 수 없어서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진정한 질문과 그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기대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논리에 따라 새로운 생각을 펼쳐 '창의적인 답'을 하면 안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오늘의 '학교'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차곡차곡 머릿속에 밀어 넣어 채우기만 했지, 그것을 다시 자신의 사고와 버무려 나만의 생각을 만들고 그것을 말로 뱉어 내는 교육도 훈련도 받아본 적이 없는 안타까운 우리 아이들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원하는 질문 모두는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러하니 그 정답을 위한 적절한 질문만이 '좋은 질문'이다. 적절하지 못한 질문을 하여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의 질문을 묵살당하거나 조롱당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질문'에 대한 지독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입을 다물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초등학교 시절을 '그나마'라는 위로로 보낼 수 있다면, 중등교육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유일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하나의 분명한 정답을 암기해야 해서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더욱 공고한 신념이 된다. 의문을 품어서도 안되고 의심을 품을 만큼 생각의 여유를 욕심부려서도 안 되는 시기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가의 시점을 파악해야 하고 시를 읽으면서는 시의 갈래나 제재, 시의 연과 행 사이사이에 덧붙여 놓은 해석을 기억해야 한다. 소설 속 특정 문장이나 시어들이 의미하는 작가의 숨은 의도도 암기해야 한다. 그것이 작가의 진짜 의도였는지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인지는 상관없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교과서에서 정의한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곧 정답이니까.


12년을 그렇게 듣고, 읽고, 보는 것에 의심 없어서 물어볼 것도 없이 지냈는데 대학에 들어갔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에 집중을 보이고, '적자생존'을 외치며 열심히 받아 적다 가도 '질문을 해보라', '생각을 말해보라'하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한다. 어른이 되어 만나는 사회조직 내에서도 질문이 허락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상하 지위체계가 분명한 조직생활에서 상명하복에 익숙해져야 한다면 지시사항에 대한 궁금증조차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지는데 하물며 반박이나 대안의 의미로 꺼내는 창의적인 질문은 시도조차 어려운 금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왜 질문을 잃어버렸는지, 그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질문을 잃어버려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고 흔한 사회적 부작용만 보아도 원인은 명백하다.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경청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어색해하며, 함께 의견을 나누어 문제 해결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것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이 ‘질문 없는 교육’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다.


이유를 알았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 시스템을 탓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그런 것들은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일이며, 그것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내 아이'가 그 변화에 혜택을 받기는 어려울 수 있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그 효력이 영향력으로 나타나려면 얼마를 노력하며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당면한 숙제(?)를 미룰 수 없는 이유다. 더구나 지금은 그 언제보다 '질문이 중요한 시대'라 하지 않는가.


멀지 않은 미래,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예고 없이 만나게 되는 미지의 기회나 도전 앞에서, 그리고 멋진 숙론의 자리에서 부끄럽게 고개 떨구고 있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기를 바란다면!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당장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 보자.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아이의 엉뚱한 질문을 환영하고, 질문하는 것이 지적인 용기임을 응원하는 것을 AI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면 우선 필요한 것은 함께하는 시간이다. 요즘 아이들은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부모님과 얼굴 마주하고 '대화'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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