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편 26 : 미국 - 뉴욕

황소 불알 만지기

by 박운서

뚜벅이의 현실과 저가항공의 만행

아침 일찍 런던 숙소를 체크아웃했다. 렌터카 트렁크에 짐 던져넣고 아우토반 쏘던 시절이 벌써 그립다. 차가 없으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는 비루한 뚜벅이 신세다. 하필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그 무거운 짐을 다 들고 계단을 올랐다. 영주 시청 의자에 붙어있던 내 소중한 무릎 연골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 기분이다.

공항 라운지에서 점심을 두둑이 해결하고 노스 애틀랜틱 저가항공에 탑승했다. 악명 높은 저가항공답게 아주 기가 막힌 만행을 저질러놨다. 만 5세짜리 아이 자리를 부모와 뚝 떨어뜨려 놓은 거다. 애를 혼자 앉혀서 대서양을 건너라는 건가? 결국 내가 아이 자리에 대신 가서 앉았다. 양옆에 낯선 외국인 여자들 사이에 끼어 쭈구리처럼 가는 신세가 됐다. 이어폰도 유료라길래 괘씸해서 안 사고, 화면에 자막만 틀어놓고 해리포터를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 보듯 감상했다.

드디어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뉴욕 도착. 미국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고 해서 긴장 팍 하고 있었는데 가족 여행객은 대우가 달랐다. 어린아이가 있는 걸 보자 줄도 안 서고 바로 프리패스 라인으로 빼줬다. 간단한 신상 확인과 숙소 확인만 거치니 심사 끝.

공항철도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캐리어와 사투를 벌이느라 진이 다 빠졌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마침 핼러윈 데이라 거리엔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피곤했지만 이 진귀한 구경을 놓칠 순 없지. 첫 맨해튼의 인상은 그냥 복잡하고 정신없는 서울 한복판 느낌이다. 넓은 에어비앤비만 쓰다가 좁아터진 뉴욕 호텔 방에 들어오니 숨이 턱 막히지만, 일단 동양 식당에서 사 온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기절하듯 쓰러졌다.


월스트리트 황소와 팁 문화의 매운맛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런던과 뉴욕의 시차 적응 중이다. 게다가 밖에서는 밤새도록 사이렌 소리와 클락션 소리가 울려 댄다. 잠들지 않는 자본주의의 심장, 불야성 뉴욕에 온 게 실감 난다.

호텔 조식 뷔페에 내려가서 배가 찢어질 때까지 먹어 치웠다. 살인적인 뉴욕 물가를 방어하려면 아침에 최대치로 칼로리를 욱여넣어 둬야 한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내가 벼르고 벼르던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증권가의 상징, 돌진하는 황소 동상 앞이다. 부자가 되게 해준다는 속설 때문에 전 세계 관광객들이 황소의 그곳(?)을 하도 만져서 불알만 반질반질하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주식 계좌 우상향을 기원하며 진지하게 쓰다듬고 인증샷을 찍으니, 아이가 배를 잡고 웃는다. 그러더니 황소 불알에 강력한 똥침을 놨다. 일명 불알침인가. 역시 내 딸이다. 떡잎부터 남다르다. 너 앞으로 크게 부자가 될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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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로 끊어둔 유람선을 타러 갔다. 구글 평점만 믿고 너무 싸게 사서 사기인가 싶었는데, 웬걸, 퀄리티가 훌륭하다. 매서운 칼바람에 패딩이 필수였지만, 뉴욕의 웅장한 스카이라인과 자유의 여신상을 눈앞에서 보니 아이도 정말 좋아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아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파리의 에펠탑이었고, 딸이 가장 보고 싶은 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드디어 두 여자의 드림 컴 트루를 모두 이뤄줬다. 가장으로서 몹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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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근처 그리스 식당에 갔다. 맛은 괜찮았는데 계산서를 보니 팁이 지들 맘대로 강제 청구되어 있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뉴욕 팁 문화의 매운맛인가. 뒷목이 뻐근해졌지만, 대신 미국 식당은 물이 공짜라는 사실을 하나 배웠다. 유럽에서 물 한 잔에 꼬박꼬박 돈 뜯기다가 공짜 물을 마시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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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퀘어의 대마 냄새와 브라이언트 공원 협상

또 새벽에 눈이 떠졌다. 이번엔 3시 반이다. 다행히 오늘부터 미국 서머타임이 해제되면서 시간을 한 시간 벌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짜로 1시간을 더 얻은 기분이라 왠지 이득 본 느낌이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타임스퀘어로 나섰다. 엄청난 규모의 전광판들이 시선을 압도하는데,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대마초 냄새가 환상을 팍 깬다. 세계 제일의 화려함과 길거리의 대마 냄새가 공존하는 기묘하고 어질어질한 도시다.

M&M, 디즈니 스토어를 돌며 군것질을 하고 센트럴파크 놀이터로 가려는데 길이 꽉 막혔다. 하필 오늘이 뉴욕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라 도로가 전면 통제된 거다. 마라톤 구경은 잘했지만 목적지를 잃었다. 차선책으로 브라이언트 공원에 가려고 했는데, 아이가 걷기 싫다며 호텔로 가자고 떼를 쓴다.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내기로 했는데, 하필 내가 졌다. 결국 공원에 가는 조건으로 아이에게 예쁜 원피스 한 벌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끙. 협상의 달인이다. 브라이언트 공원은 생각보다 작아서 실망했지만,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있는 아이스링크와 뉴욕 공립 도서관의 웅장함은 나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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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골이 퇴치법과 9만 원 방어전

어젯밤, 아이가 혼자 씩씩대길래 왜 그러냐 물으니 "엄마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못 자겠어!" 하며 한탄을 한다. 내가 꿀팁을 전수해 줬다. "그럴 땐 엄마 머리를 쓱 밀어버려." 그 말을 듣고 진짜로 엄마 머리를 미는 딸이나, 밀린다고 또 조용해지는 아내나 참 시트콤 찍는 모녀다. 덕분에 푹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아내가 일어난 김에 밀린 빨래나 돌리자고 제안했다. 호텔 세탁실에 가서 5달러를 충전하고, 유럽에서부터 악착같이 챙겨 온 세제 하나를 뜯어 넣었다. 완벽한 타이밍에 가성비 넘치는 세탁이다.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이다. 여기 입장료가 성인 1인당 30달러, 둘이면 한화로 8만 원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내 폰엔 비장의 무기 '현대백화점 앱'이 깔려 있다. 현백 앱 바코드만 보여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료입장이라는 전설의 꿀팁을 드디어 실행할 때다. 입구에서 데이터가 안 터져서 살짝 식은땀이 났지만, 재빨리 와이파이를 잡아 바코드를 들이밀었고 당당하게 무료입장에 성공했다. 9만 원 방어 성공! 아찔했던 루브르 미로 탈출에 비하면 사람도 적고 쾌적해서 구경할 맛이 제대로 났다.

내가 그토록 찾던 다비드의 명작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안 보여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하필 프랑스로 대여 출장 중이란다. 아니, 우리 가족이 며칠 전까지 프랑스에 있다가 넘어왔는데 기가 막히게 엇갈려버렸다. 아쉽지만 고흐, 세잔, 모네의 명작들로 마음을 달랬다.

저녁은 미국 가성비 마트의 끝판왕 '트레이더 조'에서 사 온 냉동 밥으로 해결했는데 진짜 눈물 나게 맛있었다. 식비 세이브까지 완벽하다. 내일은 미국의 심장 워싱턴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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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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