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딱지 젤리는 내 몫
파리 탈출과 기내에서의 심장마비
아침 일찍 일어나 무사히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반납했다. 두 달 동안 유럽의 아우토반과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자잘한 긁힘과 휠 손상도 있었지만, 풀커버 보험 덕분에 아무런 추가 비용 없이 쿨하게 반납 절차가 끝났다. 내 차였으면 가슴이 찢어졌겠지만 자본주의의 맛이 이래서 좋다.
계기판을 보니 총주행거리가 무려 9,175km. 하루 평균 160km를 달린 셈이다. 내 인생에 이렇게 단기간에 장거리를 미친 듯이 운전한 건 처음이다. 딸아이가 초록색 차체에 파란 하늘이 반사되는 게 예쁘다며 '하늘아'라고 낭만적인 별명까지 지어줬는데, 정들었던 차를 보내려니 살짝 아쉽기도 하다. 덕분에 행복했다 하늘아! 나중에 또 기회가 된다면 주저 없이 프랑스 리스 제도를 활용할 거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다가 차 안에 내 선글라스를 두고 내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낡은 거라지만 피 같은 내 돈 주고 산 건데, 여지없이 또 멍청 비용이 발생했다.
공항 체크인을 기다리는데 앞에 선 중국인들 짐 스케일이 거의 이사 수준이라 한참을 대기했다. 겨우 비행기에 탑승해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륙 후 1시간도 안 된 짧은 비행에서 진짜 식겁할 일이 터졌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갑자기 승무원을 미친 듯이 부르는 거다. 창가 쪽 승객이 숨을 안 쉰다며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끌어내고 응급처치를 하니 다행히 환자의 정신이 돌아왔다. 심장마비였던 것 같은데, 공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1열에서 직관할 뻔했다. 진짜 오싹했다.
게다가 메이저 항공사라 밥이나 음료수라도 줄 줄 알았는데, 달랑 물 한 통 던져주고 끝이다. 기내식 나오면 써먹으려고 "콜라 플리즈" 영어 대사까지 맹연습했던 우리 딸은 대실망. 미안하다 딸아, 유럽 놈들 인심이 원래 이렇다. 무사히 영국에 도착해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차가 없으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떠나보낸 렌터카가 뼈저리게 그리워졌다. 1시간 넘게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며 도착한 런던 숙소는 상상 이상으로 쾌적했다. 알디 마트와 동양 마트를 털어 라면으로 늦은 점저를 때우고,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며 런던의 첫날밤을 일찍 마무리했다.
아찔한 지하철 이산가족 위기와 코딱지 맛 젤리
다음 날 아침, 런던 숙소의 난방 시스템은 훌륭했다. 일찍 채비를 마치고 나섰는데 시작부터 카드가 속을 썩인다. 아내의 네이버 카드 잔액 부족을 시작으로 내 트래블로그 카드까지 결제가 튕기는 환장의 릴레이. 자산 관리 철저한 내 통장에 잔액 부족이라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결국 삼성페이로 겨우 교통비를 해결했다.
진짜 위기는 지하철 환승 구간에서 터졌다. 아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먼저 지하철에 태웠는데, 그 순간 야속하게 문이 닫혀버렸다. 깜짝 놀란 아이가 겁이 나서 엄마 손을 놓아버렸고, 문은 그대로 닫혀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밖에 남겨졌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리셋됐다. 말도 안 통하는 타지 지하철에서 우리 예쁜 딸만 덩그러니 실려 갈 뻔한 그 짧은 1초 동안 온갖 끔찍한 상상이 스쳐 갔다.
천만다행히도 문 근처에 있던 현지인 은인(?)께서 강제로 문을 열어준 덕분에 우리 부부도 간신히 탑승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아이랑 헤어졌다면 여행이고 뭐고 다 박살 났을 거다. 십년감수했다. 아빠가 앞으론 두 손 절대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줄줄 난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도착한 빅벤과 런던 아이, 버킹엄 궁전을 구경하는데 영국의 상징답게 날씨가 칙칙하게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청설모랑 백조 구경할 때까진 좋았는데, 근위병 교대식도 비 때문에 약식으로 대충 끝났다. 비를 쫄딱 맞으며 내셔널 갤러리로 도망치듯 피신했다.
짐 검사도 안 하길래 쏙 들어가서 아이를 안고 다니며 고흐, 모네, 세잔의 작품들을 쫙 감상했다. 구경을 마치고 근처에서 대충 점심을 먹었다.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해서 킹스크로스역 해리포터 승강장으로 가서 기념으로 코딱지 맛 젤리를 사서 귀가했다. 해리포터 읽은 지 25년 만에 드디어 그 전설의 맛을 보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코딱지 맛, 토 맛 젤리라고 하니 기겁하는 딸내미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국 돌아가면 무조건 해리포터 정주행시켜야겠다.
숙소에 오니 귀신같이 비가 그친다. 끙. 저녁엔 남은 일정을 점검하며 뉴욕 크루즈 예매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내일은 제발 날씨 요정이 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대영박물관의 약탈품과 가성비 피시 앤 칩스
다행히 하늘이 개었다. 우산은 과감히 버려두고 대영박물관으로 출발했다. 아침에 숙소 문을 나서는데 옆집 동양인이랑 마주쳤다. '헬로' 하고 인사를 나눴는데, 우리 대화를 듣더니 한국인이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패션으로 유명한 세인트 마틴 대학교 유학생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다행히 아내가 이 학교를 알아서 대화가 통했다. 우리가 대영박물관에 간다고 하니 유학생이 "아, 그 약탈 박물관이요? ㅋㅋ" 하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짧지만 유쾌한 만남이었다.
박물관 개장이 10시라 근처 코스타 커피에서 여유를 부리다 입장했다. 아침 일찍이라 사람도 없고 짐 검사도 없이 널널하게 프리패스. 영국은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 입장료가 무료라서 정말 좋다. 전 세계에서 하도 약탈을 많이 해와서 양심상 돈은 안 받나 보다. 로제타 스톤부터 이집트 미라, 그리스 유적, 모아이 석상까지 남의 나라 유물들을 알차게도 훔쳐 왔다. 도둑질도 스케일이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아이도 신기한지 꽤 재밌어했는데, 특히 고양이 미라는 압권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영국의 상징인 빨간 2층 버스 맨 앞자리에 탔다. 교통체증 때문에 속도는 거북이지만 아이가 너무 좋아하니 그걸로 대만족이다. 점심은 악명 높은 영국 요리, 피시 앤 칩스를 먹었다. 근데 웬걸, 난해한 프랑스 미식 요리보다 튀긴 생선과 감자가 내 입맛엔 훨씬 맛있었다. 무난한 맛이라 아이도 잘 먹고 말이다. 내 입맛은 철저히 가성비 실용주의에 세팅되어 있나 보다.
이어서 좁아터진 해로즈 백화점을 뚫고 들어가 아내 잼이랑 아이 간식을 챙기고, 내가 관심 있던 자연사 박물관까지 쫙 훑었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대륙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갈 짐을 쌌다. 미국은 음식물 반입 규정이 빡세서, 캐리어에 남은 짬처리용 식량들을 우당탕탕 뱃속으로 밀어 넣으며 런던의, 그리고 유럽 본토의 마지막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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