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동차 여행의 끝
불 피우는 장인과 미대륙 숙소 예약
아침에 일어나니 어젯밤 피워둔 벽난로 불이 꺼져있어 묘하게 아쉬웠다. 밖은 비가 쏟아져서 여행 나가기도 글른 날씨.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11시가 되어서야 아내를 불렀다. 짐 정리를 하려다 비가 와서 미루고, 일단 벽난로 불부터 다시 살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놈의 불이 죽어도 안 붙는다. 성냥을 수십 개나 태워 먹으며 삽질을 하고 있으니, 보다 못한 아내가 의욕을 불태우며 자기가 불을 살릴 테니 나보고는 밀린 일이나 하라고 쫓아냈다.
반신반의하며 노트북을 켜고 대망의 미국 서부 숙소 예약 작업에 돌입했다. 아고다, 트립닷컴을 이 잡듯 뒤지며 평소 갈고닦은 체리피킹 실력으로 국민카드 할인 이벤트까지 영끌해서 먹였다. 한참의 사투 끝에 LA, 윌리엄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 캐년 숙소까지 싹 다 합리적인 가격에 방어 성공. 내 자본주의 생존력에 스스로 감탄하는 사이, 놀랍게도 아내는 진짜로 벽난로 불붙이기에 성공해 있었다. 불 피우는 솜씨가 거의 자연인 급이다.
비가 그친 틈을 타 렌터카에서 핑크색 캐리어를 꺼내와 아내가 짐을 싹 정리했다. 비행기 수하물 무게를 재려고 손저울을 들었는데, 숫자가 희한하게 찍혀서 식겁했다. 알고 보니 단위가 파운드(lb)로 되어 있었다. 킬로그램(kg)으로 바꾸려고 건전지까지 뺐다 끼우는 쇼를 한 끝에 재어보니 21kg. 23kg 수하물 규정 세이프다. 그동안 옷도 버리고 라면도 다 까먹었더니 짐이 확실히 줄었다.
불 피우기에 맛 들린 아내는 저녁 먹고 꺼진 불을 또 살려냈다. 장작이 금방 타들어가서 몇 번이나 리필을 날랐다. 밤 11시에도 집 안이 찜질방처럼 덥다. 앤텔로프 캐니언 투어 예약까지 AI랑 교차 검증하며 완벽하게 끝냈고, 이제 파리, 런던, 뉴욕, 워싱턴, LA, 하와이, 도쿄까지 빡센 일정만 남았다. 남은 4주 동안 비행기만 6번 타야한다, 제대로 불태워보자.
베르사유의 웅장함과 루이 14세의 플렉스
다음 날, 늦은 체크아웃이라 푹 자고 일어났다. 아침 공기가 차가우니 아내가 또 벽난로에 불을 피운다. 이틀 머무니 재밌다고 불장난하지 산속에 살라고 하면 못 살 거다. 정리를 마치고 낮 12시쯤 베르사유 궁전으로 출발했다. 곧 낭만의 도시 파리로 입성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긴장이 됐다.
궁전 근처에 알아둔 넓고 저렴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칼바람을 뚫고 걸어가니 거대한 베르사유 궁전이 떡하니 나타났다. 나는 예전 배낭여행 때 분명 와본 곳인데 내 머릿속 지우개는 이미 다 지워버린 지 오래다.
알고 보면 이 궁전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어마어마한 돈지랄과 플렉스의 결정체다. 원래는 후미진 늪지대 사냥터였는데, 자신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려고 백성들 피땀 쥐어짠 세금으로 싹 다 갈아엎고 어마어마한 궁전을 지어버렸다. 게다가 지방 귀족들이 딴맘 못 품게 여기로 강제 이주시켜 놓고 맨날 무도회랑 파티를 열어 돈과 정신을 쏙 빼놨다고 한다. 현대인 관점에서는 뒷목 잡고 쓰러질 미친 낭비의 현장이다. 뭐, 그 화려한 사치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지만, 지금은 후손들이 이 궁전 하나로 전 세계 관광객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으니 장기 투자 관점에선 역대급 성공이라 해야 하나.
줄을 서서 입장한 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거울의 방을 지나 그 유명한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 앞에 섰다. 그림 속 핑크색 드레스 입은 여자(나폴레옹 여동생)를 찾는 소소한 미션도 클리어하고 나폴레옹 명화들을 제대로 감상했다.
마카롱 6만 원의 충격과 에펠탑 팩트폭격기
새벽 2시 반, 어디선가 들려오는 격정적인 응응 소리에 잠이 깼다. 층간소음인지 벽간소음인지, 파리지앵들의 뜨거운 사랑 나누기 덕분에 내 수면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새벽 5시가 넘어서야 겨우 다시 잠들었다.
아침 9시에 일어나 본격적인 파리 시내 구경에 나섰다. 나비고(Navigo) 교통 카드를 사서 충전하고 지하철을 탔다. 파리 지하철은 냄새나고 더럽기로 악명 높은데 생각보다 깨끗했고, 현지인들이 우리 아이를 보고 귀엽다며 자꾸 웃어줬다. 환승을 거쳐 도착한 몽마르트르 언덕. 파란 하늘이 열려서 뷰가 끝내줬다. 아이를 목마 태워주고 개선문을 거쳐 샹젤리제 거리로 넘어갔다.
아내의 지휘 아래 고급 마카롱 가게에 들어갔다. 가격이 사악했지만 눈 딱 감고 먹었는데 진짜 맛있긴 하더라. 맞은편 가게에서 또 샀다. 독일의 젤리 폭탄에 이어 여기선 마카롱 폭탄이다.
내일 비가 올지도 몰라서 오늘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지친 아이를 안고 선착장으로 걸어가는데, 드디어 저 멀리 에펠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에펠탑을 보자마자 아내의 텐션이 급상승했다. 배에 타서 아이를 자리에 앉혔는데, 옆자리에 탄 프랑스 10대 소녀들이 한국에 관심이 많은지 번역기까지 써가며 말을 걸었다.
꼬맹이들끼리 꽁냥꽁냥 소통하는 모습이 귀여워 지켜보는데, 대화 내용이 가관이다. 프랑스 소녀들이 번역기로 딸한테 물었다.
"여기에 어떻게 놀러 왔나요?"
그러자 우리 딸이 AI 번역기에 대고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엄마 아빠가 오자고 해서 왔어요."
진짜 빵 터졌다. 아빠는 너한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뼈 빠지게 운전하고 수천만 원 태워서 여기까지 데려왔건만, 딸내미 입장에선 그냥 엄마 아빠가 가자니까 억지로 끌려온 것뿐이었다. 5살짜리의 무자비한 팩트 폭격에 내 지갑이 다 숙연해진다.
유람선을 타고 센강을 가르며 루브르, 노트르담, 그리고 에펠탑까지 완벽하게 감상했다. 아이가 너무 많이 걸어 발목이 아프다며 힘들어해서 돌아올 땐 계속 안고 왔다. 내 팔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파리 투어 첫날은 대성공이다.
루브르 미로 탈출과 렌터카 여행의 끝
다음 날, 날이 추워 라데팡스 신개선문을 구경하고 다시 RER을 타고 에펠탑 공원으로 가서 거대한 에펠탑을 눈에 한 번 더 담았다.
그리고 대망의 루브르 박물관 올인 데이. 아침 일찍 줄을 서서 들어갔는데 규모가 진짜 압도적이다. 아이를 위해 유모차를 빌린 건 신의 한 수였다. 아니었으면 30분 만에 오열 파티가 열렸을 거다. 처음부터 모나리자를 향해 진격하려 했는데, 밀로의 비너스를 보고 넘어가려니 가는 길이 죄다 통제돼서 꽉 막혀 있었다. 안내판을 보고 빙빙 돌다가 미로 같은 박물관 구조에 짜증이 나서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래도 어찌저찌 길을 찾아 모나리자 누님이랑 눈도장 찍고 핵심 작품들은 다 감상했다.
루브르에 온 김에 며칠 전 베르사유 궁전에서 봤던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의 오리지널 버전도 찾아갔다. 사실 궁정 화가 다비드가 그린 이 엄청난 스케일의 그림은 세상에 두 개가 있다. 루브르에 있는 게 첫 번째 오리지널 진품이고, 베르사유에 있는 건 나중에 화가 본인이 직접 다시 그린 셀프 복제품이다.
근데 이 아저씨가 복제품을 그릴 때 기가 막힌 이스터에그를 하나 숨겨놨다. 루브르 원본에서는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이 전부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베르사유 버전에선 화가가 남몰래 흠모했던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의 드레스만 눈에 확 띄는 핑크색으로 슬쩍 칠해버렸다. 서슬 퍼런 황제 앞에서도 자기 사심은 기어코 채우고 마는 예술가의 앙큼한 직장 생활 생존기랄까. 며칠 전 베르사유에서 핑크 드레스 찾기 미션을 하고 와서 루브르의 원본 흰색 드레스랑 직접 비교해 보니 그림 보는 맛이 훨씬 찰지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여행 본전 뽑는 법이다.
이렇게 말 많고 탈 많았던 프랑스 여행, 그리고 수천 킬로미터를 달렸던 길고 긴 유럽 자동차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동안 유럽의 좁은 골목길과 아우토반을 누비며 사고 없이 우리 가족의 두 발이 되어준 푸조 렌터카도 이제 진짜 안녕이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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