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편 23 : 프랑스 - 몽생미셸, 생말로, 푸제르

샤르트르, 지베르니, 오베르쉬르우아즈

by 박운서

몽생미셸과 강제 미니멀리즘

밤새 비가 세차게 쏟아지더니 아침엔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열렸다. 희망을 품고 몽생미셸로 출발했다. 멀리서 본 몽생미셸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게 진짜 기묘하고 신비로웠다. 중세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뻘밭 한가운데다 수도원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알고 보니 사연이 참 스펙터클하다. 8세기경에 이 동네 주교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서 저 척박한 돌산에 성당을 지으라고 했단다. 주교가 개꿈인 줄 알고 두 번이나 씹으니까, 열받은 미카엘이 세 번째 꿈에 나타나서는 손가락으로 주교 이마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제야 이마에 빵꾸 난 주교가 식겁해서 돌을 나르고 지은 게 이 몽생미셸의 시작이다. 신의 계시도 결국 물리적 타격이 들어가야 먹히는 법인가 보다. 뻘밭 한가운데서 시작된 엄청난 부동산 개발의 역사다.

감탄도 잠시,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갈 땐 비가 안 오더니,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부는 딱히 볼 게 없었다. 여기도 엘츠 성처럼 밖에서 전경을 봐야 진짜 아름다운 전형적인 인스타용 명소다. 비바람에 뺨만 오지게 맞고 겨우 셔틀 타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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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해적의 도시 생말로로 향했다. 다행히 하늘은 맑았고, 지금까지 보던 아기자기한 동화 속 유럽과는 다르게 거칠고 투박한 요새 느낌이 물씬 났다. 왜냐하면 여기가 원래 프랑스 왕실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으로 남의 나라 배를 털던 '코르세르'라는 국가 공인 해적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지들이 바다에서 털어온 어마어마한 재산을 영국이나 네덜란드 놈들한테서 지키려고 화강암으로 거대한 성벽을 뺑 둘러쳐서 완전 무장 요새를 만들어버린 거다. 합법적 깡패들의 돈 냄새 밴 성벽이라 그런지 포스가 남다르다.

근데 바닷바람이 진짜 어마어마했다. 문득 서늘함을 느끼고 깨달았다. 아, 전 숙소에 내 외투를 두고 왔다. 다시 돌아가기엔 기름값과 톨비, 그리고 내 멘탈이 더 아까워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낡은 옷이니 강제 미니멀리즘 실천했다고 정신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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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 난이도 에어비앤비 방탈출과 4유로의 행복

다음 날, 큰 기대 안 했던 푸제르 고성은 생각보다 훨씬 볼 만했다. 특히 해자가 아주 인상 깊었다. 보통 성이라고 하면 산꼭대기에 짓기 마련인데, 여긴 특이하게 계곡 아래 저지대에 지어졌다. 대신 주변에 흐르는 강물을 끌어들여 성벽 주변을 빙 두르는 거대한 자연 해자(방어용 물길)를 만들었다.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자기들 땅 지키겠다고 11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돌을 쌓아 올린, 유럽에서 제일 큰 중세 방어 요새 중 하나다. 물길로 철통 방어를 해놓은 걸 보니 중세 시대 건축가들 짬바가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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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로 가는 길, 비는 엄청 쏟아지고 수마가 덮쳐와서 결국 운전대를 아내에게 넘기고 조수석에서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샤르트르에 도착해 있었는데, 이번 에어비앤비는 진짜 역대급 미션이었다. A 지점에서 주차장 키와 집 키를 획득하고, B 지점에 주차를 한 뒤, 짐을 들고 C 지점인 집으로 들어가는 극악 난이도의 실전 방탈출 게임이었다. 게다가 주차장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캐리어 들고 끙끙대며 올라가니 진이 다 빠졌다.

저녁 먹고 쉬는데 아내가 투굿투고(마감 할인 앱)를 켜보자고 했다. 근처 호텔에서 남는 조식 빵과 요거트 2개를 단돈 4유로에 주웠다. 최소 10유로는 거뜬히 넘을 분량인데 완벽한 체리피킹 성공이다. 빵 픽업 겸 샤르트르 대성당 라이트 쇼를 보러 나갔는데, 유럽의 밤거리는 진짜 음침하고 스산했다. 귀찮음을 뚫고 도착한 성당의 쇼는... 와, 내 인생 역대급이었다. 나름 눈 꽤나 높다고 자부하는데, 성당 외벽을 수놓는 빛의 예술은 피곤함을 싹 잊게 만들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침대에 누워있었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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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블루와 고흐 마을의 놀이터 텃세

다음 날 아침, 샤르트르 대성당의 그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놓치기 아쉬워 짐을 다 실어놓고 다시 구경을 갔다. 날씨가 흐렸지만 창을 뚫고 들어오는 영롱한 푸른빛은 장관이었다. 어젯밤 라이트 쇼의 메인 테마가 파랑이었는데, 이 영롱한 샤르트르 블루를 뜻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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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지베르니의 모네 생가. 솔직히 남의 빈집 구경하는 거라 패스할까 했는데, 화가로 떡상한 모네가 사들여 직접 꾸민 정원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 그 자체였다. 집 안에는 우키요에 같은 일본 판화가 잔뜩 걸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 불었던 일본 미술 유행 덕분인지 일본인 관광객도 꽤 많고 팸플릿에 일본어 설명도 있었다. 덕분에 내 녹슬지 않은 N1 일본어 실력으로 팸플릿을 슥슥 읽으며 아내 앞에서 폼 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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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흐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쉬르우아즈로 향했다.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렵다. 고흐의 그림 속 배경들이 130년이 지난 지금도 징그럽게 똑같이 남아있는 걸 보니 신기했다. 동네 공원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게 했는데, 아이가 암벽 타기를 하는 도중 어떤 프랑스 남자 꼬맹이가 다가와 손가락질하며 불어로 뭐라 뭐라 떠들었다. 자다 깨서 컨디션도 안 좋은데 낯선 애가 뭐라 하니 딸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맘이 찢어진다. 속으로는 프랑스 꼬맹이한테 사자후를 날리고 싶었지만, 교양 있는 지성인답게 꾹 참고 아이를 달랬다. 기분 풀어주려고 철봉 매달리기 특훈을 시키며 텐션을 끌어올렸다. 강하게 커야 한다 우리 딸.

마을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고흐의 무덤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생 지독한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살아생전 단 한 장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불운의 천재. 그가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생활비부터 물감값까지 전부 대주며 영혼의 지주 역할을 했던 동생 테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덩굴로 나란히 덮여 있는 두 개의 소박한 묘비를 보니 맘이 짠했다. 고흐가 권총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고, 형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 동생 테오마저 불과 6개월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나 이렇게 형 곁에 나란히 묻혔단다. 피를 나눈 형제의 먹먹한 서사다.

묘비에 적힌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고흐가 저 밀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이가 만 37세. 소름 돋게도 지금 내 나이와 정확히 똑같다. 같은 37년의 세월을 살았는데, 누구는 지독한 고독과 가난 속에서 세상을 뒤집을 불멸의 명작을 남기고 떠났고, 영주 시청 7급 공무원인 나는 악착같이 자산 굴리고 영끌해서 가족들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고흐 형님에 비하면 내게 예술적 재능이나 낭만 따윈 1도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내 옆에서 웃고 있고, 내 통장엔 충분한 금융 자산이 있다. 37살 동갑내기로서 감히 평가하자면, 아무리 죽어서 이름 날리는 천재 예술가라 한들 살아서 즐기는 내 가성비 넘치는 평범한 인생이 훨씬 따뜻하고 성공한 삶이 아닐까 싶다.

숙소 가는 길에 이틀 치 식량을 사고, 렌터카에 마지막으로 기름을 딱 10유로어치만 넣었다. 남은 거리를 계산한 철저한 연비 전략의 결과다. 도착한 숙소는 진짜 장작을 넣는 수동 벽난로가 있는 운치 끝판왕 집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프랑스 음악을 틀어놓고 타오르는 불멍을 때리니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길고 길었던,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장기 유럽 자동차 여행의 끝이 드디어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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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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