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트립 다시 시작
워싱턴의 매운맛과 셧다운 호재
시차 적응이 아직 덜 돼서 꼭두새벽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짐을 다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엔 기차여행이다.
우리가 탄 건 미국의 코레일 격인 암트랙(Amtrak)이다. 사실 천조국 미국은 자동차랑 비행기가 메인이라 철도 인프라가 한국 KTX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연착도 밥 먹듯이 하고 요금도 더럽게 비싸다. 하지만 우리가 타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북동부 노선만큼은 유일하게 돈값을 하는 미국의 KTX 같은 알짜배기 황금 노선이다. 미리 예약하면 꽤 훌륭한 가성비로 뽑아먹을 수 있다.
무거운 짐을 끌고 기차역까지 가는 건 고역이었지만, 기차 내부는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쾌적해서 가성비 대만족이었다. 기차 안에서 심심해서 미국 여행 오픈 채팅방을 눈팅하는데 미국 정부 셧다운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공무원 월급 끊기고 연방 정부가 파업하는 사태라 워싱턴 박물관들이 싹 다 문을 닫는단다. 같은 공무원 처지에 남의 나라 공무원 파업에 환호하면 안 되지만,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이 있었다. 셧다운 덕분에 당분간 미국 국립공원 입장료를 안 받는다는 거다. 며칠 뒤 그랜드 캐년에 가야 하는 내 입장에선 입장료가 굳었으니 완벽한 자본주의 호재다. 내 지갑이 굳는다는데 남의 나라 셧다운이 대수람.
하지만 기쁨도 잠시, 워싱턴 기차역 짐 보관소에서 매운맛을 제대로 봤다. 짐 하나 맡기는데 20달러란다. 며칠 전부터 가격이 올랐다는데 캐리어 두 개 40달러를 순식간에 뜯겼다. 피 같은 내 돈. 카시트까지 들이밀며 이건 그냥 해달라고 징징거리니까 직원이 쉿, 비밀로 하라며 윙크를 날리고 카시트는 공짜로 끼워줬다. 아빠의 알량한 K-애교로 몇 푼 방어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좁아터진 뉴욕과는 다르게 길도 널찍하고 깨끗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진을 남기고 백악관을 거쳐 워싱턴 기념비까지 걸었다. 여기가 트럼프가 일하는 곳인가. 걷는 도중 아이가 화장실 신호를 보내서 치즈케익팩토리에 뛰어 들어가 응아를 해결하는 소소한 위기도 넘겼다. 워싱턴 기념비를 향해 걷다 보니 아내와 아이는 지쳐서 포기했고, 나 홀로 끝까지 걸어갔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희대의 빌런으로 유명하다)와 검프가 물속을 가르며 재회하던 그 낭만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낭만은 거기까지였다. MARC 기차를 코앞에서 놓쳐 한 시간 넘게 길바닥에서 벌벌 떨었고, 짐 옮기다 넘어져서 무릎까지 까졌다. 다행히 같이 내린 현지인 아저씨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줘서 망정이지, 워싱턴 외곽 로럴 역 근처에 잡은 숙소는 결과적으로 짐 보관비와 우버 비용을 치면 그냥 시내에 묵는 게 나을 뻔했다. 뼈아픈 예산 계산 미스다. 주변 마트에 살 것도 없어서 결국 비상식량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기절했다.
LA행 비행기와 알라모 렌터카, 그리고 새로운 발 '구름이'
조식은 놀랍게도 뉴욕과 붕어빵 수준이었다. 똑같은 업체 쓰나? 투숙객 대부분이 남미 사람들이라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셧다운으로 항공편이 감축된다는 소식에 쫄아서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3시간이나 일찍 튀었다. 다행히 10달러 할인 쿠폰이 먹혀서 17달러에 현대 투싼을 타고 편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왜 나한테만 신발을 벗으라고 난리인지 모르겠지만 쿨한 척 무난하게 넘겼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이었는데, 좌석 지정이 없고 보딩 그룹으로 나눠서 탑승을 시키는 선착순 제도이다. 온라인 체크인을 늦게 해서 B그룹으로 밀렸는데, 패밀리 보딩 찬스 덕분에 A그룹 다음에 바로 탑승해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가는 개꿀을 맛봤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선 애가 벼슬이고 프리패스다.
드디어 따뜻한 LA 도착. 셔틀버스를 타고 알라모 렌터카로 향했다. 줄이 길어 막막했는데 아내의 선구안으로 키오스크를 뚫었다. 275달러에 쓸데없는 보험 업셀링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게 결제 완료. 주차장으로 가니 도요타 캠리와 알티마, K5가 떡하니 서 있었다. 2만 마일 뛴 새 차 느낌의 캠리와 4만 5천 마일 뛰었지만 가죽 시트가 깔린 캠리 하이브리드 중 고민하다가, 엉덩이 촉감을 중시하는 아내의 픽으로 후자를 골랐다. 앞으로 2,000km를 달려야 하는 미서부 로드트립의 새로운 발이 되어줄 녀석이다. 이름은 '구름이'로 정했다. 검은색 차체에 하늘의 구름이 비친 걸 보고 딸이 지어준 낭만적인 이름이다. 뚜벅이 청산하고 구름이 트렁크에 짐 다 때려 싣고 나니 이게 진짜 여행이지 싶다. 완전 자유다!
호텔로 가기 전 트레이더 조에 들러 식료품을 샀다. 그런데 트렁크를 열어보니 캐리어가 시원하게 깨져 있었다. 수하물 던지는 항공사 놈들 인성 보소. 내 무릎 연골처럼 바스러진 캐리어를 보며 오열하다가, 근처 마트로 다시 달려가 임시방편으로 붙일 청테이프와 일회용 접시를 샀다. 숙소 세탁실에서 밀린 빨래를 돌리려 했는데 25센트짜리 쿼터 동전이 없어서 강제 포기. 21세기에 동전이 웬 말이냐.
모하비 사막을 가르는 자본주의 로드트립
새벽에 일찍 깨서 피곤한 상태로 든든히 아침을 챙겨 먹고 출발했다. 캠리 하이브리드에 차선 유지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기능이 있어서 운전이 기가 막히게 편했다. 옛날에 팀장님 차 안 몰아봤으면 이런 최첨단 기능 쓸 줄도 몰랐을 거다. 핸들에 손만 살짝 얹고 신발까지 훌렁 벗어 던진 채 유유자적 도로를 질주했다. 이게 바로 K-아재의 운전 바이브다.
LA 도심을 벗어나자 본격적인 모하비 사막 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좌우로 황량하게 펼쳐진 붉은 대지와 선인장들을 보니 영화 불가사리나 델마와 루이스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활하고 미친 스케일의 풍경. 미국은 참 놀라운 나라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가는 길에 기름을 넣었는데 주변 시세도 안 보고 냅다 주유기를 꽂았다가 터무니없이 비싸게 눈탱이를 맞았다. 사막 한가운데서 주유소 사장님한테 내 쌈짓돈을 합법적으로 강도당한 기분이다.
왼쪽 눈엔 피곤해서 자꾸 눈곱이 끼고 체력은 방전되어 가는데, 애리조나주로 넘어가니 경치가 한층 더 비현실적으로 변했다. 긴 시간을 달려 시차가 한 시간 또 바뀌는 색다른 경험을 하며 저녁 6시쯤 애리조나주 윌리엄스에 위치한 햄튼 인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는 넓고 아주 훌륭했다. 무엇보다 세탁실이 카드 결제가 된다. 짤짤이 동전 찾으러 안 돌아다녀도 되니, 갓 블레스 아메리카! 문명 만세다. 얼른 빨래와 건조기를 돌려놓고 한숨 자려는데, 아내와 아이는 그 피곤한 와중에 수영장으로 간단다. 저 무한 체력 에너자이저 모녀를 어쩌면 좋을까. 피곤함에 절어 살짝 짜증을 냈지만, 막상 온수 풀에 몸을 담그니 노곤하게 피로가 풀려 좋긴 하더라. 내일은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그랜드 캐년이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바로 서점에서 만나보세요!
[교보문고]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 박운서 - 교보문고
[예스24]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 박운서 | 북루덴스 - 예스24
[알라딘]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 박운서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