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편 28 : 미국 - 그랜드, 앤델로프, 브라이스

자이언, 홀슈스 밴드, 후버댐, 라스베가스

by 박운서

대자연의 압도적 스케일과 K-가장의 눈빛 교환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주유를 하려는데 카드가 안 먹혀서 식겁했다가, 바로 옆 주유소로 가니 시원하게 긁혔다. 미국은 기름값이 한국보다 훨씬 혜자라서 렌터카 엑셀 밟을 맛이 난다. 기름통을 꽉 채우고 대망의 그랜드 캐년으로 달렸다.

매표소에 도착했는데, 며칠 전 뉴스에서 본 미국 정부 셧다운 파업 덕분에 진짜로 국립공원 입장료가 전면 무료였다. 미국 공무원 파업 만세! 같은 공무원으로서 남의 나라 파업에 환호하면 안 되지만, 일단 내 지갑이 굳었으니 완벽한 자본주의 호재이자 가성비 대성공이다.

마더 포인트(Mather Point)에 도착해 협곡을 내려다보는 순간, 진짜 숨이 턱 막혔다. 교과서나 다큐멘터리에서 수백 번은 본 곳이지만, 실제로 마주한 대자연의 스케일은 인간의 알량한 상상력을 가볍게 박살 내버렸다. 야바파이 포인트와 데저트 뷰 와치타워까지 돌면서 셔터를 미친 듯이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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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포인트를 이동하는데 갑자기 아내가 꺅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오른쪽을 보니, 야생 사슴 무리가 길을 건너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대장 사슴이 길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자기 무리가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 보초를 서며 보호하고 있었다. 역시 리더의 품격은 다르군. 나 역시 이 가족을 이끄는 K-리더로서 대장 사슴과 그윽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끄덕. '너도 처자식 건사하느라 고생이 많다.' 국적과 종을 초월한 가장들의 끈끈한 연대감이다. 뭐든 현장에 와서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으로는 홀슈밴드(Horseshoe Bend)에 도착했다. 여긴 셧다운이랑 상관없이 사유지라 주차비 10달러를 칼같이 받더라. 미국 와서 처음 낸 주차비라 살짝 배가 아팠지만, 말발굽 모양으로 굽이치는 새파란 콜로라도 강과 새빨간 절벽의 조화는 10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은 미친 풍경이었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수십 장의 인생샷을 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 20년 전 토플 책 지문에서나 보던 바로 그 풍경이다. 비록 내 영어 실력은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지만, 내 자본력은 악착같이 불어나 날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드림 컴 트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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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Page) 시내 숙소 주변 월마트에서 장을 호텔에 체크인했다. 널찍한 주차장에 수영장까지 딸려 있어서, 저녁을 먹고 세 식구가 온천 느낌으로 뜨끈하게 몸을 담갔다. 물속에서 보니 아내도 나도 여행 내내 서양 밀가루를 미친 듯이 욱여넣은 탓에 뱃살이 꽤 올랐다. 한국 가면 당장 아내랑 헬스장부터 뛰어가서 지옥의 유산소를 뛰어야겠다.


친구 가이드와 후두의 신비

오전엔 앤텔로프 캐년(Antelope Canyon) 투어를 나섰다. 이곳은 원주민인 나바호족이 관리하는 곳이라 투어로만 갈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좁은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데 아이도 씩씩하게 잘 따라왔다. 윈도우 배경 화면으로 유명한 곳이라 사진빨이라는 말도 많지만, 실제로 본 붉은빛 협곡의 물결은 정말 신비로웠다.

투어를 이끄는 친절한 현지인 가이드가 사진도 열정적으로 찍어줬는데, 내 고향 친구 누군가를 묘하게 너무 닮아서 하마터면 '야, 너 언제 미국 이민 왔냐' 하고 등짝 스매싱을 날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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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가성비 훌륭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브라이스 캐년으로 넘어갔다. 고지대라 에어컨을 끌 정도로 날씨가 제법 시원했고, 여기도 역시나 셧다운 버프로 입장료는 공짜였다! 다시 한번 외친다, 땡큐 아메리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기가 막혔지만, 이곳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놀랍게도 대자연 한복판에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의 트레일 코스가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며칠 전 뉴욕에서 주식 대박을 기원하며 황소 동상을 쓰다듬었던 그 자본주의의 심장 월스트리트를, 여기선 대자연이 거대한 붉은 암벽으로 구현해 놓은 거다.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선 내 주식 계좌가 파랗게 녹아내릴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대자연이 만든 이 붉은 월스트리트는 직접 내 두 발로 밟고 맘 편히 걸을 수 있어서 훨씬 혜자스럽고 평화로웠다. 붉은 첨탑 모양의 암석 기둥인 후두(Hoodoo)들이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하게 솟아있는 좁은 협곡 사이를 요리조리 걷다 보니, 마치 평범한 영주 아재가 스타워즈 속 외계 행성에 불시착해 탐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저녁엔 유타주 캐납(Kanab)의 깔끔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동네 마트 물가가 너무 비싸서 대충 저녁을 해 먹고 빨래를 돌렸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자쿠지에 들어갔는데, 옆에 있던 미국인 할아버지 부부랑 짧고 굵은 생존 영어로 스몰 토크도 나눴다. 나름 40일 넘게 여행했다고 글로벌 인싸력이 덩달아 올라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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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 캐년과 라스베가스의 짭(?) 명소들

캐년 투어의 마지막, 자이언 캐년으로 향했다. 거대한 암벽을 뚫어 만든 터널을 지나 오버룩 트레일(Overlook Trail)을 걸었다. 걷다가 아이가 바위에 머리를 쿵 부딪혀서 대성통곡 사이렌이 울릴 뻔했는데, 지나가던 야생 다람쥐 한 마리를 보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 함박웃음을 짓는다. 애들 알고리즘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압도적인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자이언 캐년까지, 셧다운 파업 덕분에 미국 3대 캐년을 아주 깔끔하고 알차게 공짜로 즐겼다. 다시 한번 고맙다 미국 공무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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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길고 긴 사막 운전을 거쳐 후버댐으로 향했다.

알고 보면 이 거대한 댐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미쳐 돌아가던 자본주의 역사의 묵직한 산물이다. 1930년대 미국 경제가 대공황으로 시원하게 박살 나고 주식 시장이 나락을 갔을 때, 나라 경제를 살리겠다고 국가 예산을 천문학적으로 쏟아부어 만든 초대형 공공근로 사업이었다. 전국에서 일자리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노동자들을 이 척박한 사막으로 불러 모아 목숨 걸고 콘크리트를 들이부은 피땀의 결과물이다.

이름의 유래도 참 파란만장하고 짠내가 난다.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온 국민에게 쌍욕을 먹던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이름을 땄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 내핵을 뚫고 가던 대통령이었지만,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밀어붙인 공로를 인정받아 자기 이름을 댐에 박아 넣은 거다. 중간에 정권이 바뀌면서 정적들에 의해 볼더 댐으로 이름이 강제 개명당하는 수모도 겪었지만, 결국 돌고 돌아 후버댐으로 굳어졌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인들은 결국 역사에 치적 하나 남기려고 하는 건가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평소 SF랑 액션 영화를 달고 사는 내게 이곳은 완전 성지순례나 다름없다. 트랜스포머에서 메가트론이 얼어붙어 있던 7구역 비밀 기지가 바로 여기고, 산 안드레아스나 슈퍼맨 같은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만 틀면 지진이 날 때마다 1순위로 시원하게 박살 나는 할리우드의 전속 동네 북 랜드마크 아니던가. 스크린에서 수십 번은 무너져 내렸던 그 압도적인 콘크리트 장벽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댐이 갈라지면서 로봇이 튀어나올 것 같은 엄청난 뽕이 차오른다.

더 재밌는 건, 이 후버댐에서 만들어낸 막대한 전기와 콜로라도강의 물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사막 한가운데에 세계 최고의 유흥 도시 라스베가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거다.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서민들이 목숨 걸고 지은 댐이, 지금은 전 세계 자본가들이 돈을 펑펑 쓰는 카지노의 네온사인을 밝히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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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불야성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입성했다. 호텔로 가기 전 한인 마트에 들러 영혼의 안식처인 짜파게티와 라면을 털었다. 예약해 둔 트럼프 호텔은 방은 엄청 넓은데 웰컴 워터 한 병 안 주고 묘하게 시스템이 야박하고 불편했다. 저녁으로 짜파게티를 끓여 먹다 아내가 손을 다쳐서 분위기가 갑분싸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눈치 없이 창문 한 번 열어보겠다고 깝치다가 멀쩡한 환풍기 덮개를 뜯어버렸고, 다시 안 끼워져서 아내한테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영혼까지 털렸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조상님들 말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캐년 트래킹의 여파로 하체가 박살 날 것 같았지만, 라스베가스의 밤거리를 놓칠 순 없어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나섰다.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로 베네시안 호텔의 운하, 에펠탑,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등 유럽의 명소들을 축소해 놓은 짭(?) 랜드마크들이 널려 있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우와 신기하다며 셔터를 눌러대지만, 나는 속으로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애송이들, 난 불과 며칠 전에 파리랑 로마에서 찐탱 오리지널들을 다 눈에 담고 왔지롱.' 이게 바로 세계일주 프리미엄 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합법적이고 은밀한 우월감이다.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까지 야무지게 눈에 담고 나니 아이도 나도 체력이 완전 방전됐다. 결국 화려한 카지노를 가로질러 나와 택시에 몸을 싣고 호텔로 후퇴했다.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에 세 식구가 나란히 누워 기절하듯 라스베가스의 탕진잼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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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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