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6세 딸의 생일파티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그리고 쥘 베른의 평행이론
새벽에 역시나 눈이 번쩍 뜨였다. 남은 식량들을 대충 털어 먹고, 리프트 할인 코드를 영끌해서 아주 싸게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내내 할인 코드란 코드는 다 성공적으로 빨아먹었다. 이 폼을 유지하며 일본에서도 지독한 체리피킹을 이어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일본 항공사의 규정은 미국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하물이 딱 1kg 초과했는데 절대 안 봐주길래, 땀 뻘뻘 흘리며 더운 날씨에 패딩을 껴입고 무게를 맞췄다. 빡빡한 녀석들. 그래도 비행기 컨디션은 훌륭했다. 좌석 위치도 앞쪽이라 널찍했고 기내식과 최신 영화도 빵빵했다. 발레리나, 65, 스트리밍까지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때렸는데 영화는 다 그저 그랬지만 팝콘 무비로 시간 때우기엔 최고였다.
드디어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대에 신규 공무원이 앉았는지 일 처리가 꽤 오래 걸렸다. 나는 영주시청 9급 짬찌 시절이 생각나서 동업자 정신으로 자비롭게 기다려줬는데, 옆에서 아내는 일 처리가 왜 저렇게 답답하냐며 애먼 나한테 화풀이다. 거 참,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네.
무사히 통과해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작년에 왔던 우동 가게를 다시 찾아 아내는 라면, 딸과 나는 우동을 먹었다. 물 한 잔에도 돈을 뜯어가고 살인적인 팁을 요구하던 자본주의 매운맛 미국을 겪고 오니, 물도 공짜에 팁도 안 받는 일본 식당이 그야말로 천국처럼 느껴졌다. 가격마저 천사다. 따끈한 온천에 몸을 지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쥘 베른의 주인공은 동쪽으로 돌아 하루를 벌었지만, 우리는 서쪽으로 돌아서 날짜변경선을 넘으며 하루가 더 지나버렸다. 80일간의 진짜 세계일주를 증명하는 우주적 보너스 타임이다. 참고로 지구 둥근 거 확실히 맞다. 영주 촌놈이 내 두 발로 직접 한 바퀴 돌아보고 검증 끝냈다.
시부야의 혜자 물가와 바이링구얼 딸내미의 활약
일본에 며칠 안 머무르는데 스이카 카드 보증금 몇 푼 아끼겠다고 종이 티켓을 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돈만 더 날렸다. 잔머리 굴리다 뚝배기 깨진 셈이다. 결국 바로 스이카 카드로 노선을 갈아탔다.
시부야로 넘어가 우동을 먹고 아내가 가고 싶어 했던 카페에 들렀다. 한국 물가와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로 싼데 맛은 훨씬 훌륭하다. 외식 물가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겪은 식비의 설움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일본 짱이다.
오랜만에 시부야의 명물 횡단보도를 찾다가 헤매고 있는데, 어떤 현지인 아주머니가 다가와 길을 알려주며 스몰 토크를 건넸다. 내가 나름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하니 아주머니도 깜짝 놀라더라. 어설프게 대화하다 보니 자기 딸이 피겨스케이팅 선수인데 서울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단다. 나중에 올림픽에서 꼭 금메달 따라고 오지랖 넓게 응원까지 팍팍 쳐줬다.
이어서 긴자로 향했지만 내 기대와 달리 별 감흥이 없어서, 바로 도쿄역 캐릭터 스트리트로 넘어갔다. 산리오 숍에서 딸아이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시나모롤 인형 세트를 골랐다. 가격표를 보고 헉 소리가 났지만, 모레가 진짜 딸내미 생일이니 눈 딱 감고 카드를 긁었다. 처제가 부탁한 화장품도 잊지 않고 샀다.
이온몰로 넘어가 1년 8개월 만에 추억을 되짚었다. 디즈니에서 먹을 간식과 아침거리, 각종 조미료까지 싹 다 쓸어 담고 야무지게 면세 혜택까지 챙겼다. 짐을 바리바리 들고 걷다 보니 낡은 아파트 단지가 보였고, 아내와 나중에 도쿄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나눴다. 저녁은 내가 벼르고 있던 이키나리 스테이크. 하와이 루스 크리스 스테이크의 5분의 1 가격이었지만 맛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가성비의 끝판왕이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온천장에 갔는데, 아주 기가 막힌 사건이 터졌다. 아내가 여탕 쪽 문을 못 열어서 안절부절못하고 갇힐 뻔(?)한 대형 사고가 났는데, 옆에 있던 우리 꼬맹이 딸내미가 혜성처럼 나서서 "다레카 타스케테 쿠다사이, 하야쿠!(누가 좀 빨리 도와주세요!)"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단다. 놀란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문을 열어줬다고. 내가 육아휴직 30개월 내고 바이링구얼 육아한다고 고생했 그 눈물겨운 조기 교육의 보람이 여기서 터졌다. 우리 집안의 구세주, 멋쟁이 내 딸이다.
디즈니씨 오픈런과 현금 없는 자의 짠내 투어
오늘의 목표는 디즈니씨. 그런데 현금을 다 써버려서 지갑이 텅 빈 채로 출발했다. 오픈런을 뛰었지만 줄이 어마어마하다. 재빠르게 6,000엔을 결제해 겨울왕국 어트랙션을 예약해 두고, 해저 2만 리를 연속 두 번 타며 예열을 마쳤다. 레이징 스피릿도 탔는데 우리 간 큰 딸아이에게는 난이도 하 수준이었을 거다. 아쉽게도 센터 오브 디 어스와 인디아나 존스는 운영 중지라 깔끔하게 포기했다.
인어공주 구역을 돌고 대망의 타워 오브 테러 앞에 섰다. 예전에 엄청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서 쫄았는데, 막상 다시 타보니 유럽과 미국을 돌며 멘탈이 강해진 건지 생각보다 시시했다. 좀 더 강력한 자본주의적 자극이 필요한 느낌이다.
9년 전에 아내와 왔을 때 시간이 없어서 못 탔고, 이번에 진짜 베네치아 갔을 때도 못 탔던 디즈니 씨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곤돌라도 드디어 탔고, 새롭게 열린 판타지 스프링스 구역으로 넘어갔다. 한참 대기해서 탄 라푼젤은 너무 짧아서 돈 내고 탔으면 피눈물 났을 뻔했다. 점심은 9,000엔이라는 사악한 가격을 자랑하는 아렌델 성 식당에서 먹었는데, 내부가 너무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값어치를 했다. 대망의 겨울왕국 어트랙션은 라푼젤과 달리 퀄리티가 미쳤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제대로 즐겼다. 피터팬 어트랙션도 상하이 디즈니에서 본 최신 기술이 접목되어 눈이 즐거웠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체력이 방전된 딸아이가 계속 안아달라고 칭얼대며 뻗어버렸다. 여행의 마지막 날, 육체적 고비가 찾아왔다. 더 큰 문제는 현금이었다. 랜드 안에 있는 ATM으로 돈을 뽑으려는데 내 카드를 인식하지 못한다. 멘붕에 빠져있는데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여행객도 현금이 없어서 난처해하고 있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동전을 털어보니 500엔. 호텔이 있는 역까지 목표액에서 딱 100엔이 모자란다. 구걸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내와 아이를 먼저 지하철 태워서 보내고, 나는 수수료 없는 ATM을 찾아 마이하마역까지 무작정 걸었다. 가는 길에 발견한 첫 번째 ATM은 수수료가 붙길래 쿨하게 패스하고, 기어코 두 번째 기기에서 수수료 0원으로 현금 인출에 성공했다.
무사히 아내와 합류해 귀가했고, 아이가 기절한 사이 우리는 짐을 정리했다. 수하물 45kg 리미트가 아슬아슬하지만 내일 공항에 가보면 알겠지. 짐 정리를 마치고 남자 노천탕에 올라가 홀로 몸을 담갔다. 도쿄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80일간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며 묘한 허무감과 함께 스스로에게 '진짜 고생 많았다'는 위로가 밀려왔다. 평생 잊지 못할 밤이다.
대망의 귀국,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마치며
어제도 기절하듯 잠들었고, 마침내 대망의 귀국일이 밝았다. 그리고 오늘은 80일간 전 세계를 누비며 씩씩하게 버텨준 우리 딸의 생일이기도 하다. 우리 세 식구 모두에게 진심으로 큰 박수를 보낸다.
다행히 수하물 무게는 완벽하게 통과했다. 면세 구역에 들어가니 아내가 남은 현금을 다 털어버리겠다는 기세로 초콜릿과 라면, 우동 등을 쓸어 담아 순식간에 20만 원어치를 샀다.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했고, 나는 하늘 위에서 80일간 찍었던 수천 장의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낯선 사막, 거대한 빙하, 유럽의 골목길, 아름다운 명화들, 그리고 우리 셋의 웃음과 눈물들. 하나하나 눈에 담다 보니 어느새 한국에 도착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저 멀리서 아버지가 공연을 구경하며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80일 만에 뵙는 반가운 얼굴이다. 아버지 차를 타고 고향 영주로 향하는 길, 여행을 거치며 성격이 훌쩍 밝아지고 말문이 터진 딸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여행 썰을 쫑알쫑알 풀어놓는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보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드디어 영주 도착! 어머니가 손녀 생일이라고 직접 풍선 아트와 예쁜 POP 글씨로 '축 생일' 장식을 만들어 두셨다. 딸아이는 돌고래 함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고, 오랜만에 먹는 한식 저녁은 꿀맛이었다. 우리 부부도 짐을 대충 내려놓고 장모님이 미리 빵빵하게 켜두신 보일러 바닥에 등을 지졌다. 서양식 라디에이터 따위는 감히 비빌 수 없는 완벽한 K-온돌의 따뜻함이다.
오늘은 딸아이 생일이니 아내와 딸이 함께 침대에 눕고, 나는 방바닥에 혼자 누워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이렇게 지방직 공무원 가족의 무모하고도 눈부셨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완벽하게 끝이 났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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