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너로부터
렌터카 반납과 수명 단축 폰 분실 사건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마저 싸고 미국 본토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차를 반납하기 전 기름을 만땅으로 채워야 해서 제일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로 호기롭게 달려갔다. 하지만 회원 전용이라는 매몰찬 철벽에 막혀 튕겨 나오고, 결국 다른 곳에서 제값 다 주고 기름을 먹였다. 1달러라도 아껴보려던 가성비 여행자의 뼈아픈 실패다. 공항에 도착해 정들었던 구름이(렌터카)를 무사히 반납하고 게이트까지 들어왔다.
어제 알뜰하게 챙겨 온 음식들로 점심을 해결하고 잠깐 물을 가지러 다녀왔는데, 주머니에 있어야 할 내 스마트폰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행의 모든 예약 정보는 물론이고 내 소중한 주식 계좌 앱들이 몽땅 담긴 폰이 없어지다니. 진짜 눈앞이 새카매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혼비백산해서 미친 듯이 찾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 카시트 구석에 다소곳이 처박혀 있었다. 십년감수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자마자 아내에게 정신 안 차리냐며 등짝을 시원하게 후드려 맞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내 잘못이다.
다행히 델타항공은 아이가 있는 가족을 먼저 태워줘서 쾌적하게 탑승했다. 역시 애가 벼슬이고 프리패스다. 3-3 배열이라 우리 세 식구가 한 줄에 나란히 앉으니 딱 좋았다. 미국 국내선인데도 모니터에 탈주, 보통의 가족 같은 최신 한국 영화가 빵빵하게 있어서 두 편을 연달아 때렸다. 아이랑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소울도 같이 봤다. 언제 봐도 명작이다. 비행기에서 팝콘 대신 영화 세 편을 알차게 뽑아 먹으니 어느새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10년 만의 하나우마베이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았는데 대중교통 타기가 너무 복잡해 보였다. 렌터카가 그리워진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길래 깔끔하게 우버를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비가 와서 그런가 차가 더럽게 안 잡힌다. 겨우 잡힌 기사는 무려 20분 거리에 있었다. 이거 오긴 오는 건가. 비 맞으며 오들오들 떨었지만, 도착한 중국인 이민자 기사 아저씨랑 나름의 글로벌 스몰 토크를 털며 숙소까지 무사히 왔다.
잡은 호텔은 좀 낡고 어설펐지만 방 하나만큼은 태평양처럼 넓었다. 타겟 마트에 가서 밥 먹을거리들을 잔뜩 사 와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방음이 너무 안 돼서 시끄럽길래, 일부러 낡은 환풍기 팬을 세게 틀어놓고 이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화이트 노이즈라며 억지 정신 승리를 시전했다.
다음 날, 우리는 하나우마베이로 향했다. 무려 10년 전, 풋풋했던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으로 왔던 바로 그곳이다. 예전엔 새벽에 와서 그냥 쿨하게 들어갔는데 이젠 예약도 필수고 환경 보호니 뭐니 의무 교육 영상까지 꼼꼼하게 봐야 한단다.
그런데 막상 바다에 들어가니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물은 탁해서 앞이 잘 안 보였고, 그 많던 아름다운 산호초들은 다 죽어버렸다. 10년의 세월 동안 내 무릎 연골이 늙고 닳은 만큼, 대자연도 병들고 변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재밌게 놀았다. 바람이 거세서 아이가 입술이 파래지며 덜덜 떨길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 넓은 품으로 꼭 안아주었다. 올 때 탄 우버 기사님은 한국인 아저씨였는데 워싱턴에서 사업하셨던 스펙터클한 썰을 풀어주셔서 가는 길이 꿀잼이었다.
10년의 꿈 루스 크리스, 그리고 와이키키의 밤
호텔로 돌아와 아내가 끓여준 영혼의 소울푸드 라면을 흡입하고 잠시 쉬었다. 그리고 오후 4시, 벼르고 벼르던 루스 크리스 스테이크 하우스로 출격했다. 10년 전 신혼여행 때 돈이 없어서 침만 꿀꺽 삼키고 돌아섰던 그 비싼 스테이크 집에, 내 가족을 데리고 10년 만에 다시 와서 당당하게 칼질을 하는 거다.
결혼 10주년 기념이라고 하니 식당에서 축하 아이스크림까지 서비스로 내줬다. 가족들에게 최고급 스테이크를 썰어 먹이고, 눈앞에선 내 딸이 촛불을 불고 있다. 10년 전의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자본주의 만세. 아, 내 인생 이 정도면 진짜 꽤 성공한 거 같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쇼핑몰 구경도 하고 거리 공연도 보며 비 내리는 하와이의 밤거리를 걸었다. 내 지갑은 얇아졌지만 마음만은 억만장자 부럽지 않은 완벽하고 벅찬 하루였다.
다음 날 새벽, K-직장인의 징글징글한 직업병이 또 도졌다. 가족들 다 곯아떨어졌는데 혼자 눈을 번쩍 떠서 스마트폰을 쥐고 마지막 여행지인 일본행 일정을 짜고 있다. 진짜 80일 내내 매일 아침을 이 짓거리로 시작했다. 쉽지 않은 기획자의 삶이지만 이제 진짜 끝이 보인다.
아침을 먹고 다들 침대에 누워 유튜브 삼매경에 빠졌다. 보다 못한 아내가 비싼 돈 주고 하와이까지 와서 폰질만 할 거냐며 우릴 침대에서 쫓아냈다. 주섬주섬 수영 도구를 챙겨 와이키키 해변으로 나갔다. 나는 물에 들어갈 생각이 1도 없었는데, 둘이서 파도 타며 까르르 노는 걸 보니 결국 텐션을 못 참고 뛰어들었다. 물은 찼지만 금방 적응됐고, 파도타기는 생각보다 엄청 재밌었다. 역시 놀 땐 빼지 말고 놀아야 본전 뽑는다. 하지만 물놀이 후 온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은 모래를 씻어내는 그 찝찝함과 귀찮음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최악이다.
깔끔하게 씻고 이 길었던 여행의 진짜 마지막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다. 아내와 옷 정리를 하며 캐리어를 쌌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아내의 제안으로 셋이서 와이키키 해변의 마지막 밤 산책을 나섰다. 화려한 호텔 조명들이 밤바다를 예쁘게 수놓고 있었다. 하와이의 낭만은 차고 넘쳤다. 길고 길었던 아메리카 대륙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 일본 도쿄로 간다.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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