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생 공무원 책에 '장송의 프리렌'이 숨겨진 이유

이스터에그 1탄

by 박운서

고백하건대, 나는 뼛속까지 서브컬처를 사랑하는 오타쿠다.

내 책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를 읽은 독자들은 나를 글로벌 자산배분에 미쳐있는 냉철한 실용주의자나 30개월 육아휴직을 감행한 행동파로 보겠지만, 내 정신세계의 절반은 어린 시절부터 섭취해 온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차례 원고를 다듬으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을 때, 나는 나만의 은밀한 장난을 하나 쳤다. 딱딱한 자본주의 생존기 곳곳에 내가 사랑하는 명작 애니메이션들의 명대사와 클리셰를 교묘하게 '이스터에그(숨겨진 메시지)'로 심어둔 것이다.


아는 사람만 피식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 비밀스러운 코드들을, 오늘부터 브런치를 통해 하나씩 해제해 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최근 신드롬을 일으킨 명작, <장송의 프리렌>이다.


<장송의 프리렌>에는 '힘멜'이라는 인간 용사와 수명이 천 년이 넘는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등장한다. 보통의 판타지물과 달리 이 작품은 마왕을 물리친 '이후'의 평화로운 세상을 다루며, 용사 힘멜은 극초반에 수명을 다해 늙어 죽고 만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가 죽은 뒤부터 시작된다. 힘멜은 마왕을 찌를 때보다, 길 잃은 상인을 돕고 곤경에 처한 마을 사람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줄 때 더 빛나는 영웅이었다. 홀로 남겨진 엘프 프리렌은 과거 힘멜과 함께했던 여정의 발자취를 다시 밟아가며, 예전의 그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다.

누군가 감정 없는 엘프인 그녀에게 왜 그렇게까지 남을 돕냐고 물으면, 그녀의 대답은 늘 같았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이 대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기적을 만들었다. 최근 대만의 한 지하철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한 긴 머리의 오타쿠 청년이 온몸을 던져 범인을 제압했다. 얼굴에 자상을 입은 채 등장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가상의 캐릭터가 가진 선한 영향력이 현실의 영웅을 탄생시킨, 실로 웅장한 순간이었다.


다시 내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의 본문 속에는 갓 발령받은 신규 공무원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구원해 준 한 직장 선배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나는 그녀를 '일 잘 알려주는 누님'이라 불렀다.

잿빛 성벽 같은 팍팍한 관료 조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후배를 이끌어주고 사소한 업무의 디테일까지 챙겨주던 나의 작은 영웅이었다. 훗날 나 역시 누군가의 선배가 되었을 때, 나는 그 누님이 내게 베풀었던 친절과 업무 방식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내리사랑으로 실천하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이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며, 출판사 에디터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의 덕심을 담아 프리렌의 명대사를 오마주한 한 문장을 슬쩍 끼워 넣었다.

"그 누님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렇다. 진짜 영웅은 마왕을 무찌르는 거창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만의 지하철에서도, 그리고 영주 시청의 어느 낡은 사무실 안에서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받은 선의를 기억하고 흉내 내는 그 순간마다 '힘멜'은 부활한다.


재테크와 자본주의 생존을 논하는 책 속에 이 서사를 꼭 숨겨두고 싶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팍팍한 일상 속에서 타인에게 베푸는 사소한 친절과 유쾌함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스터에그 해설은 여기까지다. 다음 2탄에서는 다른 작품의 패러디를 파헤쳐보겠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책 속에 숨겨진 서브컬처의 흔적을 저자와 함께 두뇌 게임하듯 찾아보시길 권한다.

(물론, 그냥 자본주의 생존 비법만 쏙쏙 빼먹으셔도 무방하다. 그게 재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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