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편 09 : 이탈리아 - 친퀘테레, 피사, 피렌체

다비드 엉덩이 본 사람

by 박운서

소음과 추위, 그리고 고속도로의 식은땀

라바냐의 밤은 최악이었다. 차가 지나는 소리, 사람 말소리가 그대로 벽을 뚫고 들어왔다. 새벽 4시부터 잠을 설쳤고, 설상가상으로 방은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널어둔 빨래는 반도 안 말라 있었다. 덜 마른 빨래를 주섬주섬 챙기며 생각했다. '아, 오늘 하루도 손이 많이 가겠구나.'

친퀘테레로 가는 길, 좁은 골목을 아내의 인간 내비게이션 모드로 겨우 탈출했다. 그런데 고속도로 진입 때 통행권이 안 나오는 게 아닌가? "어? 어? 그냥 가도 되나?"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지 라 스페치아 톨게이트에서 'HELP' 버튼을 눌렀다. "I'm from Lavagna..." 짧은 영어로 출발지를 말하니 8.9유로가 찍혔다. 돈을 좀 더 낸 것 같기도 하지만, 딱지 떼이는 것보단 낫다. 이탈리아 고속도로, 시작부터 스릴 넘친다.


친퀘테레 : 절벽 위의 다섯 마을과 인파

우리는 친퀘테레(Cinque Terre)로 향했다. 이탈리아어로 '다섯 개의 땅'이라는 뜻이다. 리구리아 해안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태롭게, 하지만 아름답게 매달린 5개의 어촌 마을을 통칭하는 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지형이 험준해 마을 내부로는 외부 차량 진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라 스페치아 역에 주차를 하고 기차를 타기로 했다. 항상 안전한 '내 차'로만 다니다가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니 소매치기에 대한 경각심이 풀 충전됐다. 기차에 오르니 개를 가방에 넣어 탄 아저씨가 보였다. "여기도 참 재미난 곳이네." 유럽 사람들의 유별난 반려견 사랑을 느끼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

친퀘테레의 첫 마을 몬테로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솔직히 감흥이 없다. 이미 니스, 앙티브, 모나코 같은 지중해의 끝판왕들을 보고 와서일까?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게다가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와, 중국 저리 가라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나롤라는 명불허전이었다. 절벽 위 알록달록한 집들이 바다를 향해 쏟아질 듯 층층이 쌓인 풍경.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이탈리아는 정말 발 닿는 곳마다 그림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라 스페치아 역으로 돌아와 내 차를 마주했을 때는 큰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내 차가 짱이다." 피곤해서 기절한 딸을 태우고 루카의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이곳은 깔끔하고 안전한 대박 숙소. 건조기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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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

다음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피사로 향했다. 책에서만 보던 그 기울어진 탑.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니 사탑과 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당 공사가 좀 아쉽긴 했지만, 사탑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역시 현장에 가봐야하는 거다. 우리 가족끼리 사탑을 미는 시늉을 하며 인증샷을 남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전부다 사탑을 밀어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자, 다 봤지? 가자!" 관광 소요 시간 딱 1시간. 주차비도 착하고 볼거리는 확실하고. 가성비 최고의 관광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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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입성 : 유모차 지옥과 ZTL의 공포

피렌체로 가는 길, "차량 털이 조심하라"는 전자책 내용을 보고 경각심이 풀 충전됐다. 휴게소에서 짐 정리를 다시 하고, 유모차까지 트렁크 깊숙이 숨겼다. "누가 봐도 털 게 없는 빈 차처럼 보여야 해."

하지만 피렌체 진입을 앞두고 내 손에 땀을 쥐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자들의 저승사자, ZTL(Zona Traffico Limitato)이다. 우리말로 하면 '도심 교통 제한 구역'인데, 유적지 보호를 위해 허가받은 거주자 외에는 차량 진입을 아예 금지하는 곳이다. 실수로라도 바퀴 하나 걸치는 순간 CCTV가 번호판을 찍어버리고, 몇 달 뒤 한국 집으로 수십만 원짜리 벌금 고지서가 날아온다는 공포의 대상이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초집중 모드로 운전하던 중,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잠깐, 방금 거기 표지판... ZTL 아니었겠지?" 나중에 날아올지 모를 벌금 폭탄 생각에 손이 떨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제발 아니길 빌며 일단 주차장에 무사히 입성했다.

주차장에서 시뇨리아 광장까지는 꽤 멀었다. 딸은 유모차에 태웠는데, 울퉁불퉁한 유럽의 돌바닥에 덜덜거리는 유모차를 밀며 처음으로 '이걸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도착한 광장은 지금까지 본 유럽의 어느 광장보다 웅장했고 성당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 뒤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의 사냥터였다. 가장 조심해야 할 건 '강제 우정'을 시전하는 흑인 형님들이다. "Hey, Bro!"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나 악수를 청하는데, 반갑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끝장이다. 빛의 속도로 손목에 조잡한 실팔찌를 채우고는 "우정의 선물"이라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고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바닥도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조잡한 그림들을 바닥에 쫙 깔아두고, 관광객이 한눈팔다 실수로 밟기를 기다리는 놈들도 있다. 밟는 순간 "네가 내 작품 망쳤어!"라며 돈을 뜯어내는 아주 질 나쁜 양아치들이다. 눈은 웅장한 성당을 보되, 신경은 항상 바닥과 손목에 곤두세워야 하는, 그야말로 '지뢰밭'이었다.

유모차의 진짜 시련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시작됐다. 아내가 실수로 대행사를 통해 5만 원이나 더 주고 예매한(아깝다...) 곳인데, 유모차를 끌고 간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옛 건물을 그대로 쓰다 보니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엘리베이터는 없거나 동선이 꼬여 있었다. 아이를 위한 배려는 한국 백화점이 그리워질 수준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렘브란트, 메두사를 보고 드디어 마주한 보티첼리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 "와... 진짜네." 교과서에서 보던 걸 내 눈으로 보는 감동.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린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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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유로 T본 스테이크 vs 봉화 한우

다음 날, 피렌체의 하이라이트인 T본 스테이크에 도전했다. 대학생 시절 혼자 유럽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파리 호스텔에서 만난 형이 "피렌체 T본은 꼭 먹어보라"고 했던 말이 십수 년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원래 나는 식탐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10여 년 전의 그 말이 잊히지 않아서 이건 꼭 먹어보고 싶었다.

거금 18만 원을 내고 영접한 고기.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솔직한 내 평가는... "음... 봉화 한우가 더 나은데?" 이미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어본 탓일까, 아니면 추억 보정이 깨진 걸까. 그래도 '피렌체에서 티본 먹어봤다'는 경험치에 만족하기로 했다. 역시 우리 입맛엔 한우가 최고다.


다비드상의 엉덩이

마지막 코스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다비드상. 예약 실패로 줄을 서서 들어간 그곳에서 거대한 다비드상을 마주했다. 압도적인 크기와 근육 묘사에 감탄하며 한 바퀴를 도는데, 딸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빠, 다비드 엉덩이 통통해!"

그렇다. 미켈란젤로의 걸작도 5살 아이 눈엔 그저 '통통한 엉덩이'를 가진 아저씨일 뿐. 이 한마디 덕분에 피렌체의 예술 여행은 유쾌하게 마무리됐다. 하긴, 교과서나 사진으로는 항상 정면만 봤지, 뒷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직접 찾아간 사람들만의 특권 아니겠는가.

내일은 토스카나의 보석, 시에나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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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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