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편 16 : 스위스 - 라우터브루넨, 그린델발트

융프라우, 베른

by 박운서

폭포와 11만 원짜리 감자 요리

인터라켄에 3박을 한 이유는 융프라우에 올라갈 완벽한 날씨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예보상 하루가 매우 맑음이었다. 첫날은 날씨가 약간 애매해서 주변부터 둘러봤다. 먼저 향한 곳은 슈타우바흐 폭포. 무료 주차장 같은 곳이 있었지만, 타지에서 렌터카 긁히면 내 멘탈도 같이 긁히니까 쿨하게 폭포 바로 앞에 1시간에 6프랑(약 9천 원)이나 주고 차를 댔다. 그래, 마음의 평화를 돈으로 샀다고 치자.

폭포로 올라가는 길, 아이가 앞장서며 씩씩하게 걸어 올라갔다.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바로 옆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정말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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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큰맘 먹고 스위스 현지 식당에 도전했다. 퐁듀랑 뢰스티를 시켰는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계산서를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팁 포함 11만 원. 감자를 금가루에 굴렸나? 고작 치즈 찌끄러기에 으깬 감자 던져주고 11만 원이라니.

이 돈이면 1+ 등급 갈빗살을 배 터지게 굽고 냉면에 된장찌개까지 말아 먹을 돈인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스위스 물가 맵다 매워. 그래도 식당 옆에 경치 끝내주는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를 실컷 놀렸다. 그래, 알프스 뷰 프리미엄 키즈카페 입장료 11만 원 냈다고 정신 승리하기로 했다.

숙소는 난방도 빵빵하고 식기세척기도 밀레 같은 고급이라 마음에 들었다. 밤에 창문을 여니 별이 쏟아질 듯했다. 군대 기상대 시절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외우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별자리 앱을 켜고 알프스의 밤하늘을 구경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랑 자주 별 보러 다녀야겠다.


융프라우의 고산병과 겟 어웨이

대망의 융프라우 가는 날. 아침 일찍 그린델발트 주차장으로 달렸다. 비수기라 한적해서 아주 좋았는데, 매표소에 가니 한국인 천지다. 한국인 전용 패스가 있는데, 곤돌라 1일권에 신라면 컵라면을 포함해 주는 재밌는 쿠폰이다. 문제는 가격도 아주 재미있게 사악하다는 거다. 1인당 무려 30만 원. 기차 타고 라면 하나 먹는데 30만 원이라니 스위스 산적 놈들. 아이가 아직 만 6세 이하라 공짜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내 고산병이 먼저 왔을 거다.

앞에 있던 한국인 신혼부부가 멘붕에 빠져 있었다. 곤돌라 예약을 안 해서 못 탄다는 소문을 듣고 온 모양이다. 나도 덩달아 긴장돼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현장 발권이 가능했고,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곤돌라 시간만 정하면 되는 거였다. 우리는 멘리헨을 먼저 찍고 융프라우로 가는 코스를 짰다. 멘붕 온 부부에게도 이 꿀팁을 전수해 주고 같이 곤돌라를 탔다.

중간에 내려서 간 멘리헨 놀이터는 진짜 대박이었다. 아이는 신나게 놀고, 나는 뛰어서 전망대까지 다녀왔다. 절경이 따로 없었지만 고산이라 숨이 턱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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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찍고 내려오니 놀이터에서 아주 흥미진진한 팝콘각 장면을 목격했다. 어떤 잼민이가 미끄럼틀을 자꾸 거꾸로 기어올라가니까, 자기 딸과 함께 있던 영어를 쓰는 아저씨가 극대노하면서 비키라며 겟 어웨이(Get Away!)라고 사자후를 내뿜더라. 꿀잼이라 냉큼 영상으로 찍어뒀다. 이게 나중에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디어 기차를 타고 해발 3,454m 융프라우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이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고산병 증상이었다. 헤매다가 겨우 컵라면 먹는 곳을 찾았다. 알프스 꼭대기에서 먹는 신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라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비웠다. 30만 원짜리 패스에 포함된 라면이니 남기면 손해다. 아이는 좀 자게 두고, 나는 예전 파견 근무 시절 갈고닦은 생존 중국어로 중국인 관광객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아이를 깨워 마침내 정상을 정복했다. 날씨가 환상적이라 칼바람이 불어도 기분은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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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아이가 또 토할 것 같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아까 찍은 겟 어웨이 극대노 영상을 보여주니 빵 터지면서 화색이 돌았다. 알프스 산신령도 못 고친 고산병을 서양 아재의 사자후가 고쳐버렸다.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하고 무사히 하산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고급이라고 좋아했던 밀레 식기세척기가 고장 났다. 혹시 우리 탓이라며 물어내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호스트 할머니가 쿨하게 사과하며 같이 설거지를 도와줬다. 스위스 집값으로 부동산 대박 난 할머니라 그런지 멘탈도 여유롭다. 역시 인심은 꽉 찬 곳간에서 나오는 법이다. 유쾌한 할머니 덕분에 인터라켄의 마지막 기억이 따뜻하게 남았다.


스위스 도시에 대한 편견을 깬 베른

스위스를 떠나는 길,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유명한 이젤발트 호수에서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베른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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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루체른을 보고 스위스 도시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베른은 완전히 달랐다. 장미 공원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풍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붉은 지붕들과 에메랄드빛 강물이 어우러져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공원 아래쪽에는 실제 곰을 키우고 있었는데, 아이는 곰 공원에서 진짜 곰을 보고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알고 보니 베른(Bern)이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독일어 곰(Bär)에서 유래했단다. 도시를 세운 사람이 사냥을 나갔다가 처음 잡은 동물이 곰이라서 그렇게 지었다는데, 작명 센스 한 번 참 1차원적이다. 멧돼지 잡았으면 도시 이름이 보어(Boar)가 될 뻔했네. 도시의 상징이라 예전부터 쭉 곰을 키워왔다고 하니, 여기서 곰은 단순한 동물원 구경거리가 아니라 이 동네의 진짜 터줏대감인 셈이다.

구시가지를 걷다가 아인슈타인 하우스도 들렀다.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특허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바로 이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같은 공무원인데 누구는 여기서 세상을 뒤집는 공식을 쓰고, 나는 여기서 다음 에어비앤비 예약표나 쳐다보며 가성비 상대성이론을 계산하고 있다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래도 말단 공무원 아빠가 알프스 넘어 아인슈타인네 앞마당까지 가족들 데리고 왔으니, 이 정도면 내 인생도 상대적으로 꽤 성공한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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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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