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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W Apr 05. 2020

Years & Years (2019)

디스토피아 세상의 다양한 온도.

최근 <사냥의 시간>과 같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작품들이 늘고 있다. 디스토피아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미래의 좋은 부분보다는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 <블랙 미러>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라, 더욱 관심이 가게 되었다.     

 





<현실 가능성이 있는 미래>


이 드라마의 가장 돋보이는 점을 뽑는다면 정말 우리가 ‘이게 진짜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아주 먼 미래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 현재 2020년부터 20년 정도까지의 흐름만을 다루어 더욱 와 닿고 실감 나는 부분이 많다. 미래는 겉으로 보기엔 지금과 다를 바 없을 수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간다. 매번 해가 바뀔 때마다 새해를 축하하며 터트리는 불꽃이 이를 대신해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돌아가는 모든 일을 한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다양한 연령대가 존재하며, 그래서 이 상황에 대처하는 각기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충격적이면서 신선했던 부분은 바로 10대들의 모습이다. 시대에 흐름에 맞추어 태어난 그들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누구보다 제일 자연스럽게 전자기기에 둘러싸인 채로 존재한다. 그들은 예전의 캐비닛의 자물쇠, 종이의 거칠면서 매끄러운 느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아니, 종이가 무엇인지 의미 자체를 모른다. 부모와의 공감대가 점점 사라져 결국 말할 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얼굴에 일종의 필터를 씌운 채 대화를 한다. 이렇게 예전을 그리워하는 이들과 앞으로의 빠른 변화만을 바라보며 사는 아이들, 이 두 집단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어른들은 자신이 하던 일들을 로봇, 자동화 기계가 대신하게 되어 점점 일자리를 잃고,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탓에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세상 속, 점점 무지해진다. 




아이들에게는 항상 유행 거리가 있었듯이, 이 세상에서도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일종의 ‘트랜스’ 유행이 있다. 보통 ‘트랜스’ 뒤에는 ‘젠더’가 붙어 ‘성전환 수술’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에서는 뒤에 ‘휴먼’이라는 말이 붙는다. ‘트랜스 휴먼’이라는 개념은 자신을 점점 컴퓨터, 즉 기계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극 중 베서니는 이 수술을 받음으로 인하여 손 내부에 네트워크망이 들어 있고, 자신이 일종의 핸드폰, 컴퓨터와 동일시됨을 보여준다.      


가끔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다 보면 확실히 베스트셀러에 따라 현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요즘엔 ‘나의 자아 찾기’나 ‘자기 계발서’등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은 어쩌면 자신의 자아, 본질을 파괴하고 오히려 편리함을 위해 자신을 기계화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그게 너무 소름 돋고 곧 일어날 것 같아 너무 두렵다.     


이외에도 세계에는 다양한 변화가 존재한다. 3D 프린터로 도시 전체를 복제하고, 이제는 신원 확인을 할 때 지문, 홍채 인식이 아닌 호흡으로 신원을 확인한다. 난민 문제 또한 심각해져 이제는 일정 구역에만 그들을 따로 살게 하는 법 또한 제정된다. 해마다 총리를 뽑는 선거가 TV를 통해 그들에게 보인다. 이때 비비언 룩이라는 한 정치가는 매번 과격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제지를 받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가 이 상황을 바꿀 유일한 구원자처럼 보인다. 이렇게, 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번 뭉친다>


이런 상황에도 이 가족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오랜 선거 끝에 비비언 룩이 당선되어 조금 나아지나 싶었던 상황은, 오히려 악화한다.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생기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짐에도 그들은 서로의 등을 지지대로 삼으며 정부를 고발하는데 한몫을 한다. 이렇게 삭막하고 차가운 세상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손을 건넬 사람은 가족뿐이었기에, 그 이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루시>를 연상시키며, 과연 인간은 사후세계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인간이자, 자아로 변화할 수 있는지, 미래 과학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이때에도 그들은 함께이며, 따뜻한 온기로 서로를 감싸준다. 다양한 온도를 느낄 수 있었고, 특히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이 더 가깝게 느껴진 작품이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지만, 행복했던 작품.     







어제 쇼핑을 하러 갔다가 계산대 앞 쇼핑 카트에 타고 있던 한 아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2~3살 정도 된 것 같은 그 아이는 자신의 손보다 큰, 휴대폰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드라마가 떠올랐다. 무서웠다. 이런 미래가 이제는 멀지 않았음을, 매 순간 느끼는 날이 올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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