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엄마 마음
나는 향으로 사람과 감정, 사건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나에게 그분은 [한 겨울 새벽 기도가 끝난 시간의 새벽 냄새를 가르면서도 과하지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의 세련된 지식인]이었다.
교회에 와서 정치인들이 인사하는 것을 유독 싫어했던 나에게도
매일 새벽기도에서 말끔한 모습으로 뵐 수 있었던 그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 느껴졌고
우연히 참석한 강연에서
“여러분이 절 쉽게 봐서 그렇지 저도 밖에 나가면 인사예요~”
하시는 말씀이, 그 당당함이 멋있었다.
저분 같은 남자를 만나서, 그렇게 같이 멋있게 늙어가야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진지했던 고민들을 풀어놓을 곳이 없어 무작정 매달리듯 참석했던 새벽기도에서 그분을 매일매일 봤을 때,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멀리서 응원하며 지내오던 그때
돌연 그분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
딱히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원망할 만큼의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냥 무심히 넘어간 줄 알았다.
동경의 대상에게 존경하는 대상을 잃은
나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나 보다.
꽤 오랫동안 그분의 생전 발자취를 따라가며 실망할 거리나 원망할 부분, 아니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을만한 단서라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감당할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이따금씩 툭툭 튀어나오는 그분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려 정치 쪽은 일부러라도 무신경을 유지하며.
하나님은 참 잔인하시다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아이들이 아프거나 죽을 때이다.
목사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는 다큐를 보고
한동안 아이들의 죽음에 꽂혀서 이런 일들이 생겨야만 하는 이유를 굳이 굳이 고민하곤 했다.
그 고민의 끝은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는 것.
이왕이면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해치는 일, 아이들이 아파 죽을 만큼 온 가족이 힘들다 결국 아이가 죽어버리는 일은 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왜 그런 일이 심지어 내가 느끼기엔 자주 일어나는 걸까.
왜??
왜!!
왜…
갑자기 큰아이가 밥을 많이 먹으면 키가 크냐고 묻더니 안 먹겠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내가 키가 크면 엄마가 하늘나라 가잖아”
해석하면 [내가 키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엄마가 늙어서 죽잖아]가 이유였다.
6살짜리가 어디서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받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한 이별] 정도로 해석하는 것 같다.
“딴딴이는 엄마 아빠보다 훨~씬 더 커야지! 그리고 딴딴이 가 어른이 돼도 엄마아빠 하늘나라 안 갈 거야! 엄마, 아빠가 어른이 되고 딴딴이 땡큐 낳아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안 가신 것처럼 엄마, 아빠도 딴딴이랑 같이 오래 살다가 늦게 늦게 갈 테니 걱정 마! “
몇 번을 안심시켜도, 자기 전에 또 물어보는 아이를 꼬옥 안고 토닥여본다.
우리 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아픈 이별은 조금 더 천천히 와주길..